Page 125 - 일산 그리스도의 교회 60주년사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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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긴 세월 동안 그는 어느 때는 재정의 능력으로 교회를 곧게 세  “그리스도의교회 재단을 회복하는 일은 이루었지만 가족에게 재정

 워주시고, 어느 때는 공석이 돼 버린 전도자를 대신해 설교를 하고 성  적인 상처를 안기게 되어 가장으로서 늘 미안한 맘을 안고 살아간다.”
 제
 2 장  경을 가르치셨다. 밤새 철필을 긁어 교회주보를 만들고 이튿날 아침  안 장로는 교회가 노량진으로 이주한 뒤 2개월 동안 목회자 공석이
 동 아 현
    북  이 되도록 등사판을 미는가 하면, 하루 수십리 거리를 걸으며 노방전  되었을 때 목회자를 대신해 설교와 심방, 교회 행정을 전적으로 맡아
 도를 하고 다시 심방을 돌았다.                 서 하셨다. 그 결과 목회자의 부재로 생길 수 있는 위기를 잘 헤쳐나

 그의 아내인 김점순 권사는 1964년 7월에 침례를 받았고 1990년 집  갈 수 있도록 하시기도 했다.
   시 대
 사 임직, 2000년 4월에 권사에 취임하셨다. 장남 상욱, 장녀 상희, 차  안 장로는 우리 교회가 일산으로 이주한 시기에 맞춰 전 가족이 일

 녀 상아 등 1남2녀 모두 우리 교회의 북아현동과 노량진 시대에 신앙  산으로 이사를 오셨다. 일산시대 교회의 안정화를 위해 심방활동에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저마다 자라서 교회학교 반사로 봉사를 했다.   온 정성을 기울이셨다. 이와 함께 노량진 시대 교인 가운데 아직 일산

 원래 안 장로는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의류제품 공장을 운영하였  으로 오기를 꺼려하는 성도들도 일일이 찾아가 심방하며 일산교회로
 다.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이 있으셨기에 초기부터 우리 교회의 빈약  합류할 것을 권면하시는 역할도 수행하셨다. 일산에서 새로 영입된

 한 재정을 돌보셨다. 숱한 헌금과 구제활동 긴급자금 지원 등 물질적   성도들을 심방하는 일도 맡으셔서 새 교회의 안정화와 성장에도 진력
 봉사에도 지치지 않고 우리 교회와 사랑하시는 일을 멈출 줄 몰랐다.   하셨다.

 교회 주보를 비롯해 예배일지, 회의록 등 온갖 문서의 집필과 인쇄 발  안 장로는 새벽기도회 때 가장 먼저 교회에 오셔서 교회문을 여시곤
 주, 양식의 제작, 각종 비용 및 대금의 지불 등 그의 머리와 가슴, 손과   하셨다. 그는 매일같이 목회자와 제직 그리고 성도 등 우리 교회의 전

 발 그리고 지갑은 온통 교회의 운영과 행정, 봉사로 바쁘게 돌아갔다.   가족을 위해 중보기도를 계속하고 계신다. 아내인 김점순 권사가 10여
 그 뿐인가? 어쩔 수 없이 생기곤 하는 교회의 인사나 행정, 운영방  년 전에 소천하셔서 지금은 차녀 상아 양이 안장로를 돌보고 있다.

 침을 둘러싸고 생겨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문제나 갈등 등의 문제들도   안 장로는 우리 교회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순수한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셨다.            교회가 되길 원하신다고 했다.

 마침내는 그리스도의교회 장로의 일원으로 법정문제로까지 확대된   “우리 전 성도들이 주님의 유언에 따라 전도에 집중하여 영혼구원 사
 그리스도의교회 재단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여하게 되어 자신  역을 잘 이끄는 그리스도의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의 사업과 가정이 크나큰 손실을 입게 되는 일까지도 겪게 되셨다. 그  그리스도의교회를 지켜온 믿음 60년의 거목은 지금도 이렇게 우리
 리스도의교회 재단에 속한 각 교회의 장로 대표가 연합하여 관련된 법  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적 절차와 행정, 부수적인 대책활동 등을 협의하고, 전력을 다해 지원
 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교회 재단이 제대로 회복되게 됐다. 36)

 이 과정에서 안 장로는 사업체를 제대로 돌보기 어려웠을 뿐만 아  윤병련 장로 가정
 니라 재판과정 전반에 크고 작은 비용 등을 주도적으로 지급해야 했

 기에 현실적으로 큰 손실을 보셨다. 그 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업을   윤병련 장로는 6.25 때 월남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원래 장로
 접고 오로지 교회에서 하나님 사역만을 위해 정진하셨다.    교인으로서 영락교회에 다녔었다. 그리스도의교회와 만난 인연은 아

                                   내인 서영복 권사가 대구에 살 때 임봉수 전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의
 36) 소송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물질적, 정신적 고통으로 먼저 소천한 용산
 교회 박현섭 담임목사를 안장로는 지금도 마음에 두고 추모를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 시작됐다. 나중에 가족이 서울로 왔을 때 자연스럽

 124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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