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일산교회 60주년사 E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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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우리 교회 설립 당시 시대 배경 전과 대립을 이유로 강력한 반공주의의 국시를 강고하게 밀고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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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있었다.
일 의 교 회 도 그 산 스 리
가. 1960년대 초기 한국 사회 이 모든 어려운 생존조건을 스스로 헤쳐나가기는 그 누구라도 벅차
고 힘들었다. 사람들은 가뭄과 홍수가 몰아칠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아
1960년대 초기의 한국은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이 ‘휴전’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매듭지어진지 채 10년도 지나지 사람들로 서울은 가장 사람이 많이 살면서도 가장 사람이 살기 어려
않은 상태였다. 전쟁 통에 남과 북에서 우리 민족의 거의 1/10에 이 운 지역이 돼 있었다. 그래도 서울이 아니라면 이런 사람들을 받아줄
창 경 배 립
르는 200여만 명이 숨지고, 한반도 전역은 3년 동안의 처절한 전투로 데는 없었다.
“산마다 나무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파괴됐다. 고단함과 희망, 배고픔과 기회가 공존하는 이 힘들고 어려운 대도
어떤 외국 전문가는 우리 민족이 이 처참한 전쟁의 상처에서 다시 시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밥을 위해 어떻게든 분투해야 했다. 다
일어서려면 “한 세기가 걸려도 안 될 것“ 이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른 한편으로는, 막연하게나마 세상 어딘가에는 진정한 위로와 구원이
그런 전쟁을 멈춘 지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대다수 국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고 목
민들의 생활은 참으로 궁핍했다.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보다 말라 하고 있었다.
끼니를 굶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직 국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
는 농업국가인 상태였다. 가뭄이나 물난리라도 나면 그대로 전국적인
흉년으로 이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가난의 고통 속서 더욱 나. 1960년대 초반의 북아현동 모습
신음해야 했다. 우리 교회의 초대 전도자 중 한 분인 공삼열 전도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은 남동쪽으론 도심 중심인 서대문과 광화
문, 북서쪽으론 이화여자대학교와 이웃해 있었다. 서대문과 가까운
“1960년대 북아현동교회를 개척할 당시 우리나라는 매우 가난하 평지엔 능안이라는 부유촌이 있었지만, 북성국민학교와 중앙여고 뒤
고 열악한 시대였다. 전쟁으로 도시마다 폐허가 되고 직장을 잃은 실 쪽으로 산자락에는 대부분 피난민인 빈민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
업자들이 너무 많았고... 제대로 된 기업조차 없었다.” 다. 지금이야 도로가 사통팔달로 시원시원하게 멋있게 포장돼 있지
만, 6.25 직후 그 당시에는 서울이라도 큰 길 몇 개가 전부였다. 북아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후진국처럼 정치적 불안정은 반복됐다. 현동의 큰 길은 서대문에서 이북의 의주쪽으로 달려나가는 의주로였
1960년엔 4.19 학생의거, 61년엔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졌다. 그리 다. 바로 이 길이 무악재를 거쳐 벽제-개성-평양-의주로 이어진다.
고 군정이 실시됐다. (우리 교회는 바로 이 군정 시기에 시작됐다.) 그 따라서 북아현동 지역은 6.25 때 의주로를 따라 남한으로 피난온 북
뒤 1963년 민정으로 넘어가 제3공화국이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 정 쪽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표적인 피난민 지역이었다. 피난민이 늘
부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에 기반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밀고 어나자, 나중에 온 피난민들은 남산쪽으로 돌아가 그 산등성 위쪽으
나갔다. 이와 함께 빈곤탈출을 내세운 국가 주도의 하향식 생활 및 문 로 자리잡았다. 지금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따라 남산쪽으로 올라가면
화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 운동’을 실시했다. 사회적으로는 나오는 ‘해방촌’이라는 지명도 바로 이렇게 피난민들이 터를 잡은 지
6.25의 처참한 과거 역사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남북한 사이의 냉 역이다.
54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