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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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아현동 시대의 믿음의 가족 “성도들아 찬양하자 ...천지만물 창조하신....모든 죄인 구원하신.... 우리
모두 감사하자...”
제
2 장 다음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우리 교회 초기 신앙의 본을 보인 가 찬송 노래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분명하기에 절로 이해가 되
북 정이다. 우리 모두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 신앙을 더욱 키워나가며 었다...
동 아 현
주님께 칭송을 받고 주의 몸된 교회를 굳건히 세워가는 믿음의 동역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라도 죄를
자가 되길 소망한다.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이 세상, 누구라도 구원을 마음 속 깊이 갈구하
시 대
고 있음에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그 뒤 허 권사는 우리 교회의 더없는 믿음의 선봉, 봉사의 화신이
허옥준 권사 가정 되셨다.
교회 행사 때마다 앞장서서 봉사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물
우리 교회 첫 전도의 열매로 허옥준 권사 가정을 꼽는다. 론 부흥회 때마다 강사 분들에게 침식을 책임지는 일도 허 권사 댁의
우리 교회의 초대 전도자 가운데 한 분인 공삼열 전도자가 신혼 살 몫이었다. 허 권사 댁의 욕조도 아직 세례탕을 갖추지 못한 우리 교회
림을 바로 허권사댁 문간방에 차리면서 우리 교회와 허권사 가정 사이 성도들의 침례탕으로 개방되곤 했다. 그 열심과 봉사 속에서 허 권사
아름다움의 인연과 놀라운 기적은 시작됐다. (1950년대 중반~1961년) 는 우리 교회의 ‘권사 임직 제1호’로 되셨다. 그리고 교회 여선교회의
그 당시 공전도자는 그리스도교회의 집사로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 맏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셨다.
다. 두 분 집안이 서로 얼마나 친했는지는 공 전도자의 자녀 3명의 출 자녀들도 어머니를 따라 차례로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차녀 정원
허옥준 권사
산을 모두 허 권사가 도와주었다는 사실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권사, 삼녀 혜진 권사는 교회학교 출신으로 주일학교 반사로 봉사했
공 전도자는 1962년 우리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을 때 맨 먼저 그 다. 예배당의 강단 꽃장식도 도맡아 했다.
전해까지 자신이 세 들어 살았던 집주인인 허 권사를 떠올리고 우리 이런 믿음 속에서 유교에 젖어 있던 가장이자 아버지 민영윤 집사
교회에 나와 주십사 초청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허 권사는 더 도 우리 교회로 들어오시게 된다. 그는 먼저 성경을 공부한 뒤에야 교
없이 친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지만, 매우 강한 유교적 가풍에 머물고 회에 등록하셨다. 그리고 1966년 다른 두 분과 함께 우리 교회 최초의
있었다. 유학에 젖은 남편 밑에서 철저히 유교적 의례절차를 따르고, 집사 임직을 받으셨다.
아직 세상 대부분의 사람처럼 점도 보러 다니고 있었다. 허 권사는 오래도록 우리 교회를 섬기신 뒤 1997년 아직 일산교회
하지만 공 전도자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설득했다. 6.25 때 학도병 가 어려움 속에서 신축 공사를 간신히 진행하고 있을 때 교회 완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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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참전해 숱한 죽음의 고비도 주님의 은총 아래 넘기고, 지옥과도 도우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소천하신다. 자녀들은 그 유언을 잊지
같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시체 않고 장례를 치루고 남은 비용 일천만원을 건축헌금으로 올렸다. 그
를 ‘목숨을 걸고 염을 하고 소독하며’ 중공군 간부들마저 감동시킨 공 뒤 손주들도 할머니와 부모님을 따라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되었다.
전도자님이 아닌가? 그런 은총 가운데 장녀 민복희 권사의 사위, 허 권사의 손녀 사위는
그의 끈질긴 전도에 마지못해 1962년 1월28일 북아현동 단칸방 4 집안의 첫 목사가 되었다.
평짜리 예배당의 예배에 참석한 허옥준님은 태어나 처음으로 찬송가
35) 민영윤 집사 1906.12.03. ~ 1970. 9.21
를 듣는다. 허옥준 권사 1907.12.23. ~ 199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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