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9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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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같이 북아현동 시절을 같이 보냈습니다. 43) 저는 대학 졸업하던 해 삼성그룹에 취직하였고 군대에
갔다와 삼성전자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제
2 장 북아현교회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목사님은 최광석 목사님과 임봉수 회사생활을 하면서 보수는 최고이지만 그에 따른 많은 일로
북 목사님이십니다. 주일 예배마저 빠질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동 아 현
임목사님의 전임이셨던 최광석 목사님을 통해 오랫 동안 나의 정죄 물론 회사에 충성하면 진급도 되고 좋은 보수도 보장됩니
의식으로 고민했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맛 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점점 더 내 젊음을 오직 회사에 올
시 대
보았습니다. 윤상욱 목사가 시무하는 미국 LA글렌데일 교회 인하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들었습니다. 마침내 나의 젊음을
그리고 저와 아내는 1970년 석명승 전도자님의 부흥회 때 은혜받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고심 끝에 회사의 만류 속에
고, 은혜받은 날 밤에 허옥준 권사님의 삼익아파트 목욕탕에 마련된 서도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유학길에
침례탕에서 침례세례를 받았습니다. 올랐습니다.
그때 저는 중2, 아내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참 특별한 먼저 이민 와서 사시던 큰누님 동네의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
인연입니다. 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에서 부교역자로
모태신앙이었던 저는 신앙의 갈등 없이 자랐습니다. 북아현동교회 목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97년부터 텍사스 킬린과 샌디
시절 주일은 물론이고 수요집회도 열심히 참석하는 모범생 같은 신앙 에고에서 담임교역자로 사역하다 2001년에 L.A 근교 글렌데일 그리
을 중고교를 거쳐 대학 때 보냈습니다. 당시 임봉수 목사님을 통해 말 스도의교회에 부임해 지금까지 근 20년 사역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임봉수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허락하는 대로 사역하다 은퇴를 해야겠지요. (저희는 정년이 없음)
적은 노트북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와는 1993년에 결혼하여 아들 둘, 폴(26살)과 티모티(24살)가
그리고 대학시절 졸업 때까지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있습니다. 폴은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고, 팀은 졸업 후 공부
아마도 임봉수 목사님께서 계실 때가 북아현 교회 전성기(?)가 아 를 더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숙 자매는 가난한 목회자에게 시집
니었나 생각되네요. 와서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직도 하
좁은 예배당을 꽉 메운 채 드리던 예배의 열기를 아직도 기억합니 지만, 불평 없이 열심히 돕는 배필로 제 사역에 큰 도움과 힘이 되어
다. 그리고 감사절 때나 연말연시에 교회에서 시루떡을 먹고 예배시 주어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간에 무우국을 난로에 끓이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야외예배도 즐 저는 조상숙 자매와 결혼한 것이 구원받은 것을 제외하고 일생 제
겁게 지내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네요. 일 큰 복을 주님이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아뭏든 학창시절 북아현동교회는 나의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대학 졸업후 군대 갔다 오고 난 뒤 북아현동교회에서 노량진교회 공재남 목사
시대가 시작되었고, 계속하여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섬기다 미국으
로 건너왔습니다. 공재남 목사는 공삼열 목사의 장남으로 캐나다 꿈나무선교회의 선
교사로 1998년~2021년 현재까지 콜린스 지역, Aroland(아로랜드 보
43) 다음 글은 미국에서 윤상욱 목사가 보내온 글임. 호구역), Longlac(롱랙 보호구역), 온타리오주 원주민 마을 사역을 맡
148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