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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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옷이 귀한 그 당시엔 성 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예컨대 1964학년도
도들에게 외국의 옷가지는 이 미션스쿨에 20여 명이 입학했는데 나중에
제
2 장 엄청나게 훌륭한 선물이었 목사 3명, 장로 4명, 사모 1명 등을 배출하기
동 아 현
북 다. 나아가 식량난이 극심했 도 했다. 무료로 운영하는 그리스도의교회 클
기에 많은 가정에게 미제 밀 리닉센터는 초기 우리 교인들이 더없이 애용
가루는 더없이 소중한 선물 한 소중한 시설이자, 그리스도의 공동체였다.
시 대
이었다. 특히 미제 과자는 당시 우리 나라에는 병원도 많지 않고 오늘날
변변한 과자조차 구경하기 의 건강보험제도와 같은 국민 모두를 위한 건
효창그리스도의교회
힘들었던 북아현동 일대 어 강보험 체계도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병원 의
1960년초 효창동에 세워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선교회. ❶선교사 자택, ❷번 효창동교회, ❸❹❻번 미션
스쿨 교실, ❺교무실, ❼❽번 무료진료소, ❾❿번 무료급식소. 린이들에게 엄청나게 귀하 료비가 매우 비쌌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실상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
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어린이들은 교회에서 미제 과자 선물이라도 인 채 고통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교회 무료 진료소
나오면 신바람을 내며 좋아했다. 어려운 시대 우리 교회를 찾아온 가 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없이 고맙고도 소중한 시설이었다.
난한 성도와 어린이들에게 이런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연결해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도자의 ‘선한 능력’, ‘선한 영향력’이었다. 이 전도자는 주로 주일 오전예배 설교를 맡으시고 오후엔 공전도자
마태복음 4장 23절은 바로 예수님의 3대 사역인 preaching(전도), 와 심방 전도를 하셨다. 화요일 저녁에는 학생과 청년을 대상으로 영
teaching(교육), healing(치료)을 극적으로 부각해준다. 어성경을 지도하였고 성도들에겐 거듭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침례
세례를 집례하셨다. 20)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
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전도자는 우리 교회가 개척 이후 자체 건물을 갖추도록 해 명실
상부한 ‘자립교회 시대’를 여는 등 첫 번째 도약을 주도하셨다. 1965
우리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선교도 바로 예수님의 이 3가지 사역을 년 10월에 북아현동129-17번지 주택을 구입해 자립교회로 성장하토
그대로 따라 온 열정을 모아나갔다. 바로 효창동에 그리스도의교회, 록 이끄신 것이다. 약 30평쯤 되는 주택을 사서 건물을 일부 고쳐 예
미션스쿨, 무료 진료소(클리닉센터)를 세운 것이다. 효창동 교회는 이 배당으로 쓰게 된다. 어엿한 자기 건물을 갖춘 자립교회가 된 것이다.
처럼 우리 보다 시설이나 내용면에서 많이 갖춰져 있었기에 여러 모 바로 이 주택을 사는 비용을 이 전도자가 주도해서 마련한 것이다. 교
로 부족한 우리 교회의 필요한 부분들을 많이 보완해주었다. 당시 우 회가 안정적인 성장세에 오르고 자체 건물마저 갖추자 이 전도자는
리 교회는 세례탕도 아직 없었기에 침례를 받기 위해선 효창동교회로 다음해에 청량리교회 사역을 위해 사임하시게 된다.
가곤 했다.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더 배우고 싶은 열망 이 전도자는 우리 교회의 초기 이런 외형적인 성장에 큰 기여를 했
으로 효창동교회 성경교육과정까지 추가로 참여하는 성도들도 있었 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을 위해 전력
다. 당시 그리스도의교회 미션스쿨은 오늘날의 기독교 대안학교라 할 을 기울였다.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 아래 그리스도의교회를
수 있는데,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복음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
다. 실제로 매우 많은 학생들이 이 미션스쿨을 통해 보다 성숙한 신앙 20) 통계에 의하면 1962년 ~1965년 세례자 70명을 집례하셨다.
70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