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 임승택 초대전 2024. 9. 4 – 9. 13 장은선갤러리
P. 3
표지 : 자연일정 - 서랍장 520x280x520mm
느티나무, 흑단, 은행나무, 케로잉 2024
련이 있다. 이러한 스토리는 내겐 매우 인상 깊고 흥미롭다. 그래서 길상적 의미의 전통 목어를 오방색채와 생동감
있는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 우리 삶의 실내 공간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목어는 유선형 몸통과 얇은 지느러미 몇 장이 형태의 전부여서 입체 표현의 다양성 측면에선 많은 제한 요소가 있
는 주제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바탕이 탄탄하지 않은 경우엔 오래 끌고 갈 작품의 주제로는 버겁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두발 달린 조류나 네 발의 동물이 형태의 다양한 변주에 훨씬 유리한 것이다. 예술 작업은 선택과 집중의 개념
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완성도에 따라 작업의 성패가 드러난다. 이제 와서 굳이 변주와 완성도에 유리한 다른 주제
에 한 눈을 파는 것은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간의 의리를 버리는 꼴이다. 그러던 얼마 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던 끝
에 목어의 채색 작업을 멈추고 나무 재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변화가 주는 시각적이고
정관적 측면의 느낌은 신선하다. 채색을 지우고 생략하는 것이 다소 생경하지만, 재료의 아름다움과 스토리는 도리
어 강조되는 느낌이 든다. 오래된 채색이나 자국이 그대로 있지 않고 풍화되어 탈각하면 다시 새로움의 형성과 꿈
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지된 구습에서 벗어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이나 작품에서 관성을 벗어나는 선
택적 시도이다.
내가 즐겨 쓰는 자연미는 인간의 본래적 정서에 기초한 신명과 생명력의 원천인 자연에서 새롭게 발아하는 돌기,
새 순, 사각 뿔, 나비, 잠자리, 이파리, 물고기 등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해 왔다. 이런 따뜻하고 정겨운 소재들을 목
공품에 붙이거나 깎아 나간 것이다. 또 가구 제작에서 단일 목재가 갖는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서랍 앞판에 자연
의 숨결을 상징하는 ‘바람의 이미지’를 표현해 왔다. 이것은 가로의 길이 방향으로 색상이 대비되는 다른 목재를 얇
게 켜 붙이는 세목적층기법(細木積層技法)으로 완성된다. ‘바람의 이미지’는 원초적 자연의 형상이지만 삶에 배어
있는 추억과 내면에 축적된 자화상의 은유이다. 이런 형식을 단순한 구조의 목가구에 적용하면 대비와 함께 목물
특유의 묵직한 정감을 일으킨다.
2010년 이후에 대학의 연구 과제를 진행하면서 옻칠작업에 관점을 갖게 되었다. 옻칠은 연원이 꽤 오래된 재료로
옻칠공예의 현대화는 절실하다. 이것은 기형과 문양표현의 창의적 처리가 우선하고 고식적 통념을 벗어나 현대인
의 기호에 부응해야 가능하다. 이런 생각으로 옻칠 작품을 디자인하고 최근 옻칠과 나전칠기 작품들을 발표한다.
여기엔 생생한 이파리, 연꽃넝쿨무늬, 모란넝쿨무늬, 풍죽(風竹), 우죽(雨竹) 등 자연 소재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등
장한다. 특히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풍죽과 비에 젖은 우죽의 모습은 오래전부터 나전칠기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일은 지난번의 연꽃넝쿨항아리와 모란넝쿨항아리 작업에 비하면 디자인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나무의 칠기
표현은 처음이어서 6개월의 시간동안 공부하며 집중하였다. 종이와 먹에 의한 운필 대신 명확한 나전 무늬와 새로
운 형식의 디자인을 위해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의 필법을 익혔다. 형태 깊숙이 청정불변의 기품과 탈속의 느낌을
나타내려고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예술 작품은 새롭고 한 눈에 쉽게 이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칠기
작업은 전통 형식의 성격이 강하고 자연 소재의 무늬들이 조화를 이루는 분야여서 전통미와 자연미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필자에겐 즐거운 일이다.
이런 생각으로 오랜만에 서울서 여는 개인전은 목공이나 칠공예의 수공예 작품전이 귀하기 때문에 기대도 되지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조형성에 관한 부족함과 아직 비우지 못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래
서 이번 작품전에 임하는 부끄러움은 크다. 이만큼의 작품이 있기까지 성원해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4. 8. 21. 임 승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