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이훈・안희영 초대전 2023. 10. 4 – 10. 14 장은선갤러리
P. 2

1983년부터 과제가 아닌 개인 작업을 하게 되면서 출발한 그의 작품 활동은 2016년을 기준 으로 할 때 장장 35
           년에 이른다. 고교 교사로 오랜 기간 재직해 온 작가의 직업 관계상 그의 작품 활동은 더딘 편이였지만,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는 그런 기 시간 동안 그의 삶을 통해 나는 이 방향성을 ‘유예되어 왔던 것들에 대한 모색’이라고 부르
           고 싶다. 특히 그의 작품 활동 속에서의 탐구 대상인 ‘유예’를 나는 그가 속해 있는 소위 ‘386세대’의 역사적 특수
           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자타가 공인하듯이. 이들은 여러 모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다층적 양상들을
           반영하는 세대이다. 이들에게는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전통적, 전근대적 가치관과 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한 근
           대 시민사회적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혼재는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을 불러일으키며, 특별한 종류의 내
           적 성찰과 자기 화해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냈던 20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기
           에,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이들에게 오직 눈앞에 있는 적과의 투쟁만을 강요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로 이들 세대
           는 청년기 동안 자신들에게 그러한 자기 화해의 계기 혹은 내면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할 여지를 주지 못했다. 나
           는 이러한 일종의 정체 상태가 중장년기에 접어든 그들에게 그 동안 ‘유예’된 것들에 대한 모종의 감각을 불러일
           으킨다고 본다.
           나아가 이처럼 그들 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유예’는 그들의 삶을 극적인 방향으로 바꿔 왔다. 특히
           그것은 한 세대 내의 스펙트럼을 다른 세대에 비해 지나치게 넓게 느껴질 만큼이나 벌려 놓았다. 가령 어떤 이들
           은 이 유예를 해결하지 못한 채 중년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동시대의 20대와 별반 다를 방치하거나 그
           만도 못한 정신적 지체 상태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유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되돌아봄으로써 다
           른 세대와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진지함’을 띄우기고 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도 이러
           한 경향은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는데, 작가에서의 ‘유예’ 해결의 개인적 양상은 ‘내면적 물음들에 대한 천착’으
           로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그의 작품들을 시기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의 초창
           기 작품들은 추상을 본령으로 삼아 돌,철 등의 무거운 재료들을 사용하여 다양한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은유적
           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를테면 90년대 초 그의 작품들 중 ‘시대 정신(II)’(1991), 혹은 ‘시대-멍에를 짊어진 승리자
           (I)’(1990) 등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거시적 담론들이 그 예시로 주어질 수 있겠다. 이는 80년대 중순부터 한국 미
           술계를 휩쓸었던 거대한 흐름 중 하나인 ‘민중 예술’ 계통으로부터의 정신적 세례의 결과로 보이며, 진지함과 고민
           은 보이지만 그 시기를 스쳐 왔던 수많은 민중 예술 계열 작품들과 구별되는 작가만의 독특한 작업 양태가 뚜렷하
           게 드러나진 않고 있다. 이는 정말 그런 주제들이 작가에게 온전히 소화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작업 방향은 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목재로 주 작업 소재를 바꾸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점차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누적된, 혹은 ‘유예’된 내적 고민들에 대해 묻는 새로운 모색기에 접어듦으로써, 우리
           는 그가 비로소 온전히 자기 것인 물음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제작
           된 ‘매달려 있는 것-생명력I’(1994), ‘삶-생명이 자라는 곳’(1993)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작가의 방향 전환을 확인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생명력’ 혹은 ‘자연’ 같은 큰 주
           제들이다. 또한 그가 작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티프들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전통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던 소재들이다. 물론 그만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어떤 형태나 소재들의 결합은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확
           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남는다.
           이번 개인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최근 작업들은 그런 내면적이고 추상적인 고민들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어 우리 앞에 보여 주려는 시도들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2002년 이후 그가 구상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도입하게 되면서 점차 확실해지고 있다. 이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구상 제작 교육이 필
           요해진 상황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2004년 이후의 작업들에서 그는 이런 구상을 필요성에 의한 도
   1   2   3   4   5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