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김은 개인전 2025. 10. 22 – 11. 9 아트뮤지엄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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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로 쓴 순환의 기록
김은의 예술은 ‘소멸’과 ‘생성’의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녀의 작업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재료와 감정, 시간의 흐름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스스로 형태를 빚어가는 하나의 순환적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재료는 한지와 한지죽이다. 김은에게 한지는 단순한 조형의 바탕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 그리고 삶의 시간들이 스
며든 존재이다. 그것은 쓰고 버려지고, 젖고 마르며 다시 형태를 얻는 순환의 재료이며, 작가의 내면과 손끝의 감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매개
하는 물질이다.
김은은 작업 속에서 한지를 찢고, 태우고, 그리고 던진다. 이 던지는 행위는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통제와 해방 사이의 감정의 파동을 물질
로 번역하는 신체적 언어이다. 작가는 한지죽을 화면 위로 던지며, 그 순간의 내면의 진동을 물질의 질감으로 변환시킨다. 던져진 한지죽은
중력의 방향을 따라 흘러내리고, 공기와 시간 속에서 스스로 굳어간다. 작가는 그 우연의 결과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연이 만들어내
는 질서와 균열을 받아들이며, 감정의 물리적 흔적을 화면 위에 새긴다. 이때 ‘던지기’는 우연의 물리학이자, 감정과 자연의 힘이 교차하는 순
간의 기록이다.
그녀의 작업은 그렇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사유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던짐 이후의 기다림은 시간과 물질이 함께 작업하는 과정이며,
그 기다림 속에서 한지는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형태를 바꾸며 스스로의 생명을 얻는다. 그녀의 태운 한지 시리즈는 이와 같은 행위의
또 다른 층위에 놓인다. 찢기와 태우기의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이며, 흔적이자 재생의 표지이다. 한지의 가장자리를 태우는 과정에서 남
겨지는 검은 윤곽은, 소멸의 잔여물이자 새로운 생명의 경계선이다. 작가는 불이라는 원초적 에너지를 통해 ‘사라짐’이 곧 ‘탄생’의 일부임을
증명한다. 그녀가 말하는 ‘소멸과 생성’은 바로 이 순환의 논리 위에서 작동한다.
한편, **‘직선 시리즈’**는 감정적 행위의 폭발과는 다른 층위의 사유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관념의 창살’**이라 부른다. 직선은
질서와 규율, 수직과 수평이라는 세계의 골조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위에 한지죽이 불규칙하게 흘러내리고 굳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표
면은, 그 질서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감정의 흔적이다. 수직은 상승의 의지, 수평은 내려놓음의 평온을 의미하며, 이 둘의 교차는 긴장과
쉼, 구속과 해방이 맞물린 정신적 구조를 암시한다.
김은은 이 직선적 골조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가 스스로를 가두는 ‘관념의 틀’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 창살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내면을 투시하고, 창살 너머의 ‘평온의 세계’를 향해 사유의 손을 뻗는다. 이렇듯 김은의 예술은 물질적 행위와 정신적 사유, 감정의
흐름과 시간의 흔적이 서로 교차하며 완성된다. 한지라는 재료는 이 모든 층위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찢고, 태우고, 던지
고,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작가는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질서 속으로 자신을 내맡기며, 소멸과 생성의 리듬을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한지는
더 이상 평면의 재료가 아니라, 감정과 사유의 생명체로 진화한다.
전시 제목 **〈소멸과 생성 그리고…〉**는 이 모든 세계의 흐름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리고…’라는 여백의 언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순환의 시
간, 미완의 세계를 암시한다. 김은의 화면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열리고 변형될 수 있는 열린 세계이다. 그녀의 작업은 한 번의
완성이 아니라, 다시 던지고, 태우고, 기다리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완성되는 **‘생성의 미학’**이다. 김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사라짐을 두
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녀는 소멸을 끝이 아닌 변화의 시작으로, 흔적을 새로운 탄생의 형태로 바꾸어낸다. 그 세계에서 재는 빛이 되고, 파편은 다시 형상이 된다.
그것은 결국 예술이 끊임없이 묻는 근원적 질문 ―
“사라지는 것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 사라짐은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가?”
에 대한 김은만의 응답이다.
2025. 10. 김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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