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 권지은 초대전 2024. 1. 3 – 1. 26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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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반야용선도 95x70cm
비단에 채색 2023
를 위한 헌사(辟邪)이자, 내 안에 잠든 가능성을 끝까지 깨워 만사형통하라(起福)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고
법과 현실인식을 가미한 새로운 에너지의 창출은 “본질을 상실한 오늘날의 채색화단”에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다.
기본을 지키는 새로움은 또 다른 확산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용은 실체가 없는 상상의 동물이기에, 작가가 해
석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접근해 생명력을 부여해야 한다. 권지은 만의 배색(配色)은 끊임없는 재료실험과 자기와
의 싸움이다. 그림은 시간 흐를수록 선명한 색조와 귀한 빛을 내뿜는다. 화학재료가 아닌 천연재료(돌가루)로 만
들어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방색은 ‘한국적인 에너지’와 결합했을 때 독특한 시선을 갖는다. 자기 개성화와
보편성을 획득한 중화된 균형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고려불화의 미감과 만난 ‘용의 레이어’
우리는 흔히 고려불화를 빛과 바람의 그림이라고 말한다. 스미듯 연결한 배채법의 감성을 작품 전체로 연결한 권
지은의 작품들은 <기룡관음도>에서 최고미감을 발휘한다. 이른바 용두관음(龍頭觀音), 보살형존상(菩薩形尊像)
이 용의 등 위에 서서 바다 위를 날면서 마귀를 물리치는 형상이다. 기룡보살도(騎龍菩薩圖) 속 용두관음(龍頭觀
音)은 33관음의 한 분으로, 용을 딛고 구름 위나 바다 위를 나는 관음을 말한다. 화려하나 과하지 않은 보관(寶冠),
수월관음도에서 관찰되는 우아한 사라(명주실로 짠 비단), 바람이 불면 차랑차랑 흔들릴 것 같은 관음보살의 매무
새는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불화의 에너지를 오늘로 이어지게 한다. 뺨과 턱은 둥글고 풍만하게 표현돼 있으면서
도 근엄하기보다 친근한 인상을 주며, 우리 시대에 충실한 비례미를 가미해 ‘현대화된 보살로의 전이’를 성취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용의 표피가 촘촘한 선묘로 연결돼 상상과 현실을 상징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작가의 해석과
만난 ‘구도-비례미-형태미-색채-선묘’ 등은 전성기 불화미감을 인지하기 위해 두 번이나 찾은 “후쿠오카박물관에
나온 폭 2.5m 높이 4.2m의 압도적 고려 불화”와의 교감에서 더욱 확고해진 느낌이다. 불화의 선은 사소한 선이라
도 5번 이상 그어야 완성될 만큼 선묘에 에너지가 담겨야 한다. <반야용선도> 역시 용과 불화가 결합된 유일무이
한 그림으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아이들과 선한 이들을 향한 ‘벽사와 기복’의 헌사(獻辭)
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전시의 묘미는 운룡도(雲龍圖)가 모란과 만난 변주이다. 구름 속에서 승천하는 쌍룡을 직접 사생한 모란도와
결합한 작품으로, 후쿠오카미술관에서 발견한 최고 기량의 모란도에 대한 감화를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인터뷰
에서 “정원에서 직접 모란을 키우며 사생한 작품들은 다른 그림을 모방하며 그린 것과 다른 ‘생생한 생명력’을 갖
는다. 직접 모란을 키우며 그린 경험 때문인지, 수백 년 전 화가의 모란도 역시 사생(寫生) 모란이라는 점을 한눈
에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꽃의 왕 ‘모란’이 동물의 왕 ‘용’과 만났을 때, ‘동·식물을 에너지를 모두 갖춘 단 하나의
화룡(花龍)’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적으로 해석하면 모란은 구름과 같이 공간을 분할하고 위계를 정리하
며 조화와 균형을 가르친다. 부처가 ‘상상인물화’라면, 권지은의 화룡(花龍)은 구름(상상)과 모란(사생)의 교차 속
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갖는 ‘상상 현실화’로 재탄생한다. 사생과 상상이 섞였다는 사실은 실제 모란을 키우면서 그
려낸 사생 정신을 깨달아야만 아는 지점이다. 작가는 한국불화의 전통을 계승과 창조의 조화 속에서 찾는다. 상상
을 강력한 리얼리티로 전환한 권지은의 변주는 벽사와 길상, 권위와 염원을 우리 삶에 부여함으로써 전통의 계승
과 현대화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불화의 현대화’를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가치가 아닌 ‘현실인식과 기
본에 충실한 가치’ 속에서 발견해 낸 것이다.
- 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