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송기재 초대전 2025. 4. 2 – 4. 11 장은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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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속 현대인은 어떤 모습일까.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떤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송기재 작가는 너무도 당연한 사회라는 존재 속 현대인의 모습을 ‘토끼’로 상정한다. 먹이사슬의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소리를 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성대가 퇴화함으로
써 오히려 생태계 속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른바 ‘퇴행적 진화’의 형태를 보이는 토끼
의 모습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다움을 스스로 내려놓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았다.
작품 속 인물이 뒤집어쓴 토끼탈은 완벽한 ‘구(球)’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외부
의 도움 없이는 절대 멈출 수 없는, 완벽해 보이지만 불완전한 구의 모습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 속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커다란 토끼탈에 비해 턱없이 작은 눈과 귀는 성대와 마찬
가지로 퇴행적 진화를 통해 생존해가는 토끼, 아니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의 손에 들린 기다
란 방송용 마이크는 퇴화한 감각기관 대신 기술의 힘을 빌려 세상과 소통하는 현대인들의 기묘한 소통
방식을 이야기한다.
그림 속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정장 차림을 한 토끼 현대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길을 걷기도
하고 핸드폰을 하기도 한다. 방 안 의자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가 하면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기
도 한다. 하지만 낯설다. 현대인을 닮았지만 그림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 생경한 일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최첨단 사회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 어떤 불행도 고통도 없는 사회 속에서
현대인은 모두가 똑같아지며, 외부 세계가 제공하는 감각에 의존해 쾌락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가 정
해놓은 책임과 규칙 속에서 진열대 위에 나란히 놓인 병처럼 전시되고 부품처럼 살다가 스러진다.
퇴화되어 획일화된 개인과 달리 사회는 여러 모습으로 변주한다. 토끼 현대인 뒤편에 있는 배경은 붉
은 벽돌 벽, 동물원의 울타리, 컨테이너 박스 등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서 있다. 그 너머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관람객은 알 수 없으며 토끼 인물조차 다른 세계에는 무심해 보인다. 벽으로 단절
된 현재의 ‘멋진 신세계’ 안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단 하나의 일탈이 있다면 벽에
그려진 갖가지 낙서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라곤 사회 시스템에 낙서 같은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작가는 이 모든 현상을 그저 관찰한다. 그 자신도 현대인이지만 사회와 개인의 양상을 관조할 뿐 이에
대한 그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미 현대로 오면서 더 촘촘해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울타리든 벽이든 그 어떤 모습이든 현대인은 그 속에서 안락함과 편리함
을 누린다. 때로는 자유를 억압받고 자신을 잃는다고 느껴도 사회적 생명체로서 공동체적 유대감이 주
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실상 사회를 벗어나는 순간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속하고, 속하고자 하면서도 벗어나고자 한다.
관람객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관조하는 사람으로 기능한다. 작가가 그려낸 사회 속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한편, 체험 형태로 마련한 섹션에서는 직접 벽에 낙서를 하고 색을 칠함으로써 참여하는 사람으
로의 변모를 꾀한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어딘가 편하면서도 불편한 이 멋진 신세계를 몸소
느껴본다.
- 글 조 서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