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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1 The Protestant Reformation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섬김과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
가 이렇듯 가톨릭교회를 비난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참석하라고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프레데릭 선
제후와 대학이 이에 반대하였고 대신 카예탄 추기경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를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러
나 이 심문에서 루터는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성서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추기경은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루터를 로마
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루터를 보호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 논쟁이 일어났다. 엑크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이전의 주장처럼, 인간은 잘못 판단
할 수 있으며, 인간을 구원해 줄 대상은 같은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고, 오직 그리스도만
이 인간에서 교회의 우두머리임을 역설하였다. 이 논쟁으로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더이상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은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60일 안에 루터가 자신
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또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루터는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와 로마 교회의 법전을 불태웠다. 결국 1521년 1월 3일 루터는
최종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파면 당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은 보호의 테두리 밖으로 쫓겨나는 것과 다름 없어 매우 위
험하였다.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의 청문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해주었다. 카를
5세 황제는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보름스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루터는 보름스로 갔다.
루터는 그 청문회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카를 황제는 3주 이내로 보름스를 떠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름스에 있을 동안에는 신변을 보호해주었다.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자, 황제는 루터를 법에
서 추방하였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제는 누가 그를 살해하거나 상해하여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
다. 위험해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위장 신분으로 지내며 숨어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로 되
어 있어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제 대중들은 성직자라는 중
간자 없이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독일
어는 현대 독일어의 표준이 되어 독일어를 통일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에 있던 루터는 그러나 농민전쟁이나 에
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차츰 구별을 지어갔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한 종교적 환경을 만들고 이끄는 개혁 활동을 계
속해나가면서 성서 강의, 설교 등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정치와 결합한 로마 가톨릭
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역시 지배세력과 결탁
하여 농민전쟁에서 영주의 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제후들과
결탁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진행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
다. 이는 마틴 루터의 한계점으로 지적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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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섬김과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
가 이렇듯 가톨릭교회를 비난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참석하라고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프레데릭 선
제후와 대학이 이에 반대하였고 대신 카예탄 추기경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를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러
나 이 심문에서 루터는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성서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추기경은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루터를 로마
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루터를 보호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 논쟁이 일어났다. 엑크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이전의 주장처럼, 인간은 잘못 판단
할 수 있으며, 인간을 구원해 줄 대상은 같은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고, 오직 그리스도만
이 인간에서 교회의 우두머리임을 역설하였다. 이 논쟁으로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더이상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은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60일 안에 루터가 자신
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또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루터는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와 로마 교회의 법전을 불태웠다. 결국 1521년 1월 3일 루터는
최종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파면 당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은 보호의 테두리 밖으로 쫓겨나는 것과 다름 없어 매우 위
험하였다.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의 청문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해주었다. 카를
5세 황제는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보름스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루터는 보름스로 갔다.
루터는 그 청문회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카를 황제는 3주 이내로 보름스를 떠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름스에 있을 동안에는 신변을 보호해주었다.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자, 황제는 루터를 법에
서 추방하였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제는 누가 그를 살해하거나 상해하여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
다. 위험해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위장 신분으로 지내며 숨어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로 되
어 있어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제 대중들은 성직자라는 중
간자 없이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독일
어는 현대 독일어의 표준이 되어 독일어를 통일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에 있던 루터는 그러나 농민전쟁이나 에
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차츰 구별을 지어갔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한 종교적 환경을 만들고 이끄는 개혁 활동을 계
속해나가면서 성서 강의, 설교 등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정치와 결합한 로마 가톨릭
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역시 지배세력과 결탁
하여 농민전쟁에서 영주의 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제후들과
결탁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진행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
다. 이는 마틴 루터의 한계점으로 지적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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