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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1 The Titanic

배에는 모두 16척의 구명보트와 4척의 접는 보트가 있었지만 승객의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자
정을 지나자 선장은 배의 운명이 약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침 10마일쯤 떨
어진 곳에 캘리포니안호가 운항하고 있었지만 이 배는 무선 통신을 꺼놓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타
닉호에서 보낸 구조 신호를 듣지 못했다. 배에 승선한 2,200명 중에는 현재의 화폐 가치로
55,000달러 이상의 많은 요금을 내고 일등실에 탄 세계의 거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저 요금
의 하층 객실에는 700명의 이민자들이 타고 있었다. 사망자 중 상당수는 최저 요금 객실에 있던
승객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갑판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배에
탔던 여성 중 1등실 여성 승객은 97%가 생존했지만 2등실은 84%, 3등실은 55%만 생존하였
다.

해저 4,000m에서 인양한 유물 중에는 해양 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만한 귀중한 공예품도 많았다.
특히 여우 머리 장식핀(14k 금과 유리로 제작), 7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백금 펜던트, 1~2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백금 반지 등의 보석품은 일등실 승객의 것으로 추정된다. 보석 이
외에도 향수병, 3등석의 식기 그리고 정부와 함께 승선했던 남자의 보험금 영수증, 이름 없는 승
객들의 신발, 가방, 모자 등 약 5,500점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모두는 지금 보물이 되어
있다.

타이타닉호 침몰의 영향

당시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낙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당시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
희생자 수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
대의 해난사고"라고 불렸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711명에 불과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항해
의 안전성 확보에 대해서,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를 열어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
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SOLAS), 1914)
이 채택되었다. 또한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
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으며, 이중에는 타이타닉의 자매선 올림픽호, 브리타
닉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 장치 배치의 의무 부여가 강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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