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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1 A Labor of Love
또한 기록자들은 그녀가 „정치적 야심을 털끝만치도 품지 않은 완벽한 아내였다‟고
기록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시아버지 자항기르가 총애했던 누르 자한(뭄타즈 마할의
이모)과 비교되곤 했다.
뭄타즈 마할은 19 년의 혼인 생활 동안 14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여덟은 출산할
때 또는 유아 시절 사망했다. 뭄타즈 마할은 1631 년 14 번째 아이(딸 가우하라 베굼)를
낳다가 부르한푸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데칸 고원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남편을 수행하고 있었다.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또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뀔 정도였다.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중앙의 능을 완공한 것이 1648 년, 묘역 전체는 착공 22 년 만인 1653 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 옆에 자신의 능묘로 흑색 타지마할을 짓고자
했다는 설도 있지만 문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설은 아니다.
탑에 갇혀 아내의 묘만 바라볼 수 있었던 말년
황위 계승을 위한 권력 다툼은 샤 자한의 말년에 재현됐다. 1657 년 샤 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이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장남 다라 시코는 병든
샤 자한을 대신해 사실상 대리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합집산의 전쟁 끝에 1658 년
최후의 승리는 아우랑제브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탑에 갇힌 샤 자한에게는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곁에서 돌본 것은 첫째 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였다. 샤 자한은 1666 년
1 월 22 일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하나라는 성대한 국장을
준비하려 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다.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아내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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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록자들은 그녀가 „정치적 야심을 털끝만치도 품지 않은 완벽한 아내였다‟고
기록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시아버지 자항기르가 총애했던 누르 자한(뭄타즈 마할의
이모)과 비교되곤 했다.
뭄타즈 마할은 19 년의 혼인 생활 동안 14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여덟은 출산할
때 또는 유아 시절 사망했다. 뭄타즈 마할은 1631 년 14 번째 아이(딸 가우하라 베굼)를
낳다가 부르한푸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데칸 고원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남편을 수행하고 있었다.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또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뀔 정도였다.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중앙의 능을 완공한 것이 1648 년, 묘역 전체는 착공 22 년 만인 1653 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 옆에 자신의 능묘로 흑색 타지마할을 짓고자
했다는 설도 있지만 문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설은 아니다.
탑에 갇혀 아내의 묘만 바라볼 수 있었던 말년
황위 계승을 위한 권력 다툼은 샤 자한의 말년에 재현됐다. 1657 년 샤 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이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장남 다라 시코는 병든
샤 자한을 대신해 사실상 대리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합집산의 전쟁 끝에 1658 년
최후의 승리는 아우랑제브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탑에 갇힌 샤 자한에게는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곁에서 돌본 것은 첫째 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였다. 샤 자한은 1666 년
1 월 22 일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하나라는 성대한 국장을
준비하려 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다.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아내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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