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강화산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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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saan, Kang - Incidental Dominion i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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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모순명제로 비칠 수도 있다.
강구원은 오래 전 깊은 산중에서 작업했을 때의 체험을 토로한다. 마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86-
1944)가 석양에 비친 자신의 작품에서 추상화면을 보았듯이 강구원은 어떤 우연적인 힘에 의해 작품이 완결되
었던 경험을 토로한다. 실패작이라 생각하여 밖에 펼쳐 두었던 작품에 비와 이슬이 내린 후 완결되었다는 느낌
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던 어떤 일에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어떤 필연의 역사(役事)가
있다는 생각은 이어 성경 안에서의 자유, 불교 안에서의 부처와 같은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우연의 역사(役事) 이면의 종교적인 필연이라는 모순된 명제는 다시 종교성이 포함된 진실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작업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내 작품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있는 작품’을 원했던 루오
(Georges Roualult, 1871-1958)의 두껍고 신심 깊은 작품이나, 천상의 음악이라도 들려올 만큼 경건한 미켈란젤
로(Michelangelo Buonaroti, 1475-1554)의 『천지창조-Genesis』라기보다는 일견 ‘환칠’처럼 보이는 돌발적 터치
와 우발적 흔적을 통해 그 종교성에 접근하려 한다.
그 종교성이란 시대성이다. 우리 시대의 종교는 도상과 상징에 의해 경건함을 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
는 인스턴트 식품에 익숙한 세대에게도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가벼움이 있고, 그러면서도 그 뒤에 언제나 새로
운, 또는 지루하지 않고 싫증나지 않는 어떤 세계라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첨필(添筆)이나 가필(加筆)이 허용
되지 않는 일필휘지(一筆揮之), 혹은 석도(石濤)가 말하는 일획(一劃)의 정미(精微)한, 그리고 절대적인 힘에 대
한 신념이 강구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석도는 그림이야 사람이 그린다지만 일획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림을 그릴 때 귀한 것이 생각이고 생각이 일관되면 마음이 상쾌하여 정미(精微)하
고 예측할 수 없는 깊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석도류의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명제는 그리하여 지극히 명상
적이고 철학적이다. 모순 명제를 정면 돌파하여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인도하는 우연의 지배라는 명제가 먼저 그
러하다. 그리고 우연의 지배에 따른 부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상을 문학적, 서술적, 또는 수필적 가벼움으로 펼
쳐내어 보인다. 1996년 전시의 부제였던 ‘고기잡이를 위한 씻김’에서 강구원은 마치 물밑에서 노니는 물고기 떼
의 위에 물로 태우는 소지(燒紙)를 띄운 것 같은 이중구조의 화면을 보여준다. 거기에 분할된 화면을 접합하는
부적같은 도상, 그리고 화면의 설명과는 무관한 문자가 조형요소로서 자리한다. 이 모든 것이 어울어져 전해주
는 메시지는 가벼움 속의 진지함이다.
2005년 ‘마음으로 세우는 탑’에서는 탑을 세우지 않았던 송광사에서 본 마음의 탑을 소재로 했다. 공들여 만든
바탕 화면 위에 탑은 실제의 이미지를 본 따거나 연상되는 탑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탑은 중력이
나 구조와는 무관한 마음의 탑이다. 현상에서 본 이미지들은 때로 탑이라는 괄호 안에 갇히거나 실제의 모습에
서 해방된 점이나 색반점, 또는 의미를 수반하지 않는 문자나 숫자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가필하지 않는 화면은 현
재에서의 완전함을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이라 일컫는 해탈의 경지를 표방한다.
대전제 : 우연의 지배를 지배하는 필연
그리고 이번 전시의 부제인 ‘고요와 움직임’이 있다. 여백은 시원해지고 표상적인 이미지와 비서술적(Non-nar-
rative)인 문자 사인은 여백과 행복하게 조화된다. ‘고기잡이를 위한 씻김’의 초월적인 중층구조는 대담한 배색의
확신있는 구성으로 대체된다. ‘마음으로 그리는 탑’의 도발적인 마음 탑은 그렸다가 지운 형상의 그림자와 같은
완충공간을 통해 여백과 교신하면서 더욱 유연해진다. 포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포말이 강구원의 확신을
극대화한다. 인터뷰를 끝낼 즈음 개구리들이 여백 속의 터치처럼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연의 지배를 표방한 필연
의 찬가를 부르는 강구원의 화실 바깥에서는 여백처럼 조용한 전원 산골의 평온을 깨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화면
을 파고드는 단속선의 전기적 충격파처럼 강구원의 일상과, 대화와 그리고 정신의 안정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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