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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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칭의론도 신약 구원론의 보편적 구조, 즉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벌써 받았습
니다. 그러나 그것의 완성은 아직 받지 못하고, 그의 재림 때에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
이 신약 종말론의 보편적 구도입니다. 칭의론도 그 구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벌써 의인이라고 칭함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구
원의 완성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유보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지금 우리가 받음은 그 구원의 ‘첫 열매’, 곧 의인이라 지레 인정됨에 해당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의 행위대로의 심판을 거쳐서(참조. 롬 14:10;
고후 5:10) 그 구원의 ‘온전한 수확’(의인으로 확인됨, 흠 없는 자로 판정됨 ‐ 살전 3:13;
5:23; 고전 1:6~8; 빌 1:10~11)을 거두게 되어 있다. 칭의의 첫 열매를 지금 선취하지만, 그
것의 완성은 종말에 최후의 심판에서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무죄 선언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 ‘의인’은 이제 그 올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 즉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기를 이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이 ‘의로운’ 삶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이
며, 그런 사람이 최후의 심판 때 ‘의인’으로 확인됩니다. 그것이 칭의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칭의론 이해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와 종말론적인 유보를 간과함으로
써, 칭의 또는 의인 됨(구원)과 의인으로 살기(윤리)가 구분되는 문제를 낳게 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흔히 듣는 복음은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았고, 그
것은 최후의 심판 때 확인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냥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이
것은 보통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결론을 함축한다)”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
입니까? 구원파적 복음 아닙니까? 구원파는 이것을 자기들의 신학적 확신으로 솔직히 말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대다수의 한국 교회도 사실상 이런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암암리에 구원파적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파’적 칭의론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
기까지 하여, “우리가 의인으로 이미 칭함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태초부터 나를 구원으
로 예정하셔서 의인이라 이미 칭하셨어. 그러니까 종말에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나를 지켜
주신다(이것이 성도의 견인론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나의 구원은
확실하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윤리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윤리
와 분리된 신앙(구원의 확신)을 가르치고 믿는 한국 교회의 비극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의로
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며 구원의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
는 한국 교회의 비극입니다. 이것은 칭의론의 관계론적 의미와 종말론적인 유보를 간과한,
부분적이고 왜곡된 복음을 선포하는 데서 오는 비극입니다.
5) 회복된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음’의 중요성
우리의 구원이 종말의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연히 우리가
처음 복음을 믿음으로 칭의 된 순간부터 최후의 심판에서 칭의가 확인될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 문제를 칭의론의 구조 속에서 이
해하려 하지 않고, ‘구원의 서정’의 틀 속에서 칭의(justification) 뒤에 ‘성화’(sanctification)
의 과정을 설정하여 해결하려 했습니다. ‘칭의’ 된 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
(glorification;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후의 심판 때 결국 우리의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