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최근일 작가 e-book 2022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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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그 후로 시작된 나의 ‘이화 작업’은 하얀 배꽃을 근경(近景)
에 어두운 청회색의 밤하늘을 원경(遠景)에 배치하여 청초함
과 밝음, 깊이 있는 어둠이 조화를 이루도록 따스한 봄밤을 생
각하며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밤하늘의 색감을
2016년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라는 주제
더욱 풍성하게 하여 그린, 블루, 레드, 엘로우의 파스텔 톤으
로 밤하늘의 별과 풍경 작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4년째 접
로 밝게 표현하고 있다. 밤하늘의 풍경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어들고 있다. 3년 전 개인전에서는 천재 시인 윤동주의 시(
주제를 회화적(繪畵的) 서사(敍事)를 통해, 밝고 화사한 밤
詩)를 모티브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그림 展’이라는 소주
의 풍경으로 재해석하였으며 ‘밤하늘은 언제나 어두워야 해!’
제로 회색조의 컬러와 나무의 실루엣 사이로 먼 밤하늘을 라는 고정의 관념을 탈피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고민
올려다 보는 극고원(極高遠)의 시점(視點)으로 화면을 구 하였다.
성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처한 현실의 ‘허무’
화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배
와 ‘밤’이라는 어두운 주제가 스스로에게 공감대를 불러일
꽃의 꽃말처럼 작가인 나 자신도 작업을 통해 ‘위로와 위안’을
으켰던 모양이다. 그래서 화면은 어둡고 무거웠다. 그것은
받고 싶다. 그 위로 와 위안이 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일종의 ‘강박(强迫)’이었다.
고스란한 온기로 전달되어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내년에는 남녘에 봄바람이 불어오면 이화가 만개한 배밭
이듬해 봄, 전남 나주에서 작업하는 선배의 작업실에 들를
에서 휘영청 밝은 달을 안주 삼아, 스치듯 비껴가는 별똥별을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와 곡차를 나누느라
희망 삼아,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조지아 오키프의 영혼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이 되었다. 취기가 올라 잠깐 소중한 사람과 실낱같은 사랑에 대해, 부질없는 인생과 예술
바람을 쏘이러 밖에 나왔다가 천지개벽의 풍경을 대면하게 을 이야기하면서 도갓집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다.
되었다. 낮에는 그냥 배밭이었던 풍경이 어두운 밤이 되어
서야 진짜 진풍경(珍風景)이 되었다. 어찌 이리도 무지하고
몰랐을까? 이화(梨花)가 만개한 달밤과 하늘! 그때의 설렘
과 감동은 형언할 수 없는 몽유(夢遊)의 세계였다. 청초하
고 우아하게 만개한 배꽃들 사이로 어두운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달과 별들이 품은 서정은 고려 말 충신 이조년(李兆
年)의 시조 “이화에 월백 하고”를 떠 올릴 수밖에 없었다.
梨花(이화)에 月白(월백)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 제
一枝春心(일지춘심)을 子規(자규)ㅣ야 아라마
多情(다정)도 病(병)인 양여 못드러 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밤. 가지 하
나에 깃든 봄의 마음을 두견새가 어찌 알겠냐 만은, 다정한 것
도 병이 되어 잠 못 들어 하노라’
C H O I K E U N I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