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문이식 교수님 e-book 2022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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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사라지는 것’과 ‘남은 것’...
그 미묘한 대립의 미학
김영남(경향신문사 부국장)
작가는 지난한 작업의 시간과 공간을 채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흐르는 붓질,
우는 영겁의 이야기들을 ‘아이덴티티 상흔처럼 멈칫하게 만드는 작은 붓놀림,
(Identity)’라는 한 마디에 담고 있다. 낙서처럼 화면을 기어가는 숫자들은 리
작가의 시간을 지나 작품이 된 아이덴티 듬감 있게 다가와 분노와 환희의 순간을
티는 누구의 정체성을 말하는 걸까? 생 제공하며 우리가 아는 기호와 숫자로 위
각은 꼬리를 잇고 기억을 더듬어 주변을 로의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은밀함과 욕
살피게 한다. 망이 뒤엉킨 찰나 뒤에 맛보는 카타르시
극도의 외로움 뒤에 찾게 되는 그 시간에 스처럼 선을 넘는 정서의 환기.
작가는 화살표로 은밀하게 커뮤니케이
션 통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캔버스 앞에서 오롯이 풀어내는 작가의
작가는 바깥 세계와의 커넥션 도구로 ‘화 작업은 감상자에게 자유를 제공하고 있
살표와 아라비아 숫자’를 선택하고 있다. 다. 산이나 하늘, 도시, 인물 등 비로소
국적, 나이, 성별을 아우르며 누구나 공 형상을 지워낸 작품들은 감흥을 강요하
감할 수 있는 화살표와 숫자는 작가의 여 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러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누구 “이제는 당신 차례야”라고 말을 걸듯.
에게나 어떤 환경에서도 방향을 제시해 파블로 피카소는 ‘지우는 일은 모양을 바
주는 화살표와 암호 같은 숫자의 반복은 꾸고 더 보태서 아름다움을 완성해 나가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생각을 끝없 는 과정’이라고 했다. 작가는 의도했든
이 윤회시킨다. 하지 않았던 어떠한 형상이나 메시지도
떠올리지 못하게 아이콘을 지우고 있다.
형상을 지우고 마침내 자유로운 에너지 전시를 할 때마다 잠재력의 방식을 달리
를 내뿜는 작품들은 즉흥적인 감수성으 표출하는 작가는 의식적으로 우리들 무
로 이어지며 작가의 격렬한 감정을 고스 의식 깊은 곳의 욕망을 툭툭 건드린다.
란히 전하고 있다.
m o o n , l e e s i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