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정유리 작가 e-book 2022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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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머금다, 담다, 비우다
자연을 닮은 종이, 한지는 은은하고 수수한 외관을 하고 있다.
현대인의 화려한 맵시를 조롱이나 하듯이 격조 있고 단아한 빛깔로 그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지는 그 자체로 독창적인 소재이며,
다양한 오브제 표현 속에는 조형 언어의 마술과 같은 표현이 담겨 있다.
나는 수많은 한지의 재료와 기법중에서 줌치기법으로 작업의 근간을 삼았다.
한지를 찢고 자르면서 구기고 비비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새로운 형(形)과 색(色)의 탄생
여기에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단함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풀무질과 같은 힘든 작업 속에서
살짝 드러난 심적(心的) 여유
줌치한지 위에 지승기법을 이용한 연잎의 잎맥들은
섬유질 사이사이 쌓여가는 삶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문뜩, 법정스님의 말씀 중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연잎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연잎에 깃든 비움의 자세와 느긋한 여유
작업 과정이 힘들고, 시간에 쪼들리며, 바삐 돌아가는 세간의 일상
비움과 절제의 마음을 연잎에 담아 또 다른 시작을 드러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