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부안이야기19호
P. 19

계 인사가 다수 참석해서 표창식을 거행했다. 이들 각                     다음에 다른 곡식과 섞어서 밥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면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주민들을 울력으로 강제                       나문재만 먹으면 곧 복통이 일어나고 일주일만 계속
                   동원하여 도로 정비를 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문재가 얼마나 위험

                                                                     한지도 모르고 우선 갯벌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고 배
                                                                     를 채울 수 있으니 먹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흉년과 나문재                                     흉년이 되면 부종병(浮腫炳) 환자들이 발생한다. 이

                                                                     병은 영양 부족 등으로 몸의 한부분이 기능을 못해 온

                     농사짓기에 충분한 물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궁안·                     몸과 얼굴이 붓고 숨이 차는 증상이다. 이런 병에 걸리
                   삼간평은 농사짓기가 어려운 천수답이었다. 이것은                        면 부황났다고 한다. 1924년에 행안면에서 부종증에
                   오로지 하늘에서 직접 떨어지는 빗물에만 의존하여                        걸린 사람이 백 명 가량이 되었다.
                   짓는 농사다. 작은 방죽이 이런 갈증을 풀어주기는 어

                   려웠다. 그런데 행안은 간척지가 많아서 물의 수요가
                   많은데도 가뭄을 자주 겪으니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가뭄 속에서 농사짓기
                     1920년대에 바다를 막은 둑들이 있었지만 해일이
                   나면 자주 무너졌다. 농사짓고 나서 나락을 말리기 위                      상당히 건실하게 만들어진 장뚝도 해일에 의해 무너

                   해 논에 볏단을 쌓아놓았다. 해일이 나서 둑이라도 터                     졌다. 12)  당시에 장뚝을 용동궁장제(龍洞宮長堤)라 했
                   지는 날이면 논에 쌓아놓은 ‘궁안리 나락이 떠내려가                      는데 장제(長堤)에서 장뚝이란 말이 온 모양이다. 장
                   서 월암산 위에 걸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해                     뚝은 삼간평과 궁안, 대벌리 앞으로 6㎞ 정도 이어졌
                   가 심했고 바닷가 사람들은 인근 산으로 피난을 가야                      다. 몽리구역은 3천 정보의 광대한 평야였다. 그러나

                   했다.  9)                                           제방이 완벽하지 않으니 홍수나 해일로 매년 3, 4회씩
                     1924년에 부안에서 재해가 가장 심한 곳은 행안이                    무너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고쳤
                   었다.  10)  총호수 1,048호 중에서 근근이 생활하는 호수              으나 그 피해가 막심했다. 이러한 제방을 방치한다면
                   가 824호에 2,167명이고 집을 떠나 유리하는 호수가                   논들이 바닷물에 잠겨서 다시 갯벌이 될 수밖에 없는

                   160호에 803인, 거지생활이 38호에 174인으로 조사                  처지였다. 그래서 이곳 800여 호 주민들은 생사의 기
                   되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절도가 심해서 마을                      로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장뚝과 바닷물이 오가는 곳에
                   에서는 자위단을 조직했지만 유명무실했다. 워낙 굶                       갑문을 수축하도록 순시 중인 도지사에게 주민들이
                   주리는 사람들이 많고 기아가 심한 곳에서는 이것조                       진정하기도 했다.

                   차도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봄철 농사철이 되면 주변에 있는 저수지에 물을 대
                     피해가 심한 바닷가 사람들은 갯나물인 나문재라는                      는 문제로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지주가 저수지 물을
                   풀로 연명하였다.      11)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인데도 먹을             독점하면서 삼간리 일대 농민들은 못자리 물을 구하
                   것이 없으니 어머니와 아이들은 떼를 지어 나문재를                       지 못하여 큰 타격을 입어 군에 진정을 냈다.            13)

                   찾아 해변에서 방황했다. 그런데 이 나문재라는 풀은                       물싸움은 이웃 마을끼리 집단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
                   워낙 독하여 삶아서 삼사일 동안은 물에다 담가 불린                      다. 1936년 7월 10일 밤 10시경에 삼간리 사람들과 궁



                   9)임기태 증언. 10)「동아일보」 1924. 10. 16.  11)「동아일보」 1924. 10. 17. 12)「동아일보」 1932. 5. 18. 13)「동아일보」 1936. 5. 22.




                                                                                                                  019
                                                                                         기획특집1_행안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