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제2권_Neat
P. 136
그러나 청호역은 18세기 말에 양재도가 영화도로 변경되면서 혁파되기에 이른다. 정조 20년(1796)
수원에 화성이 건설되고, 수원이 경기도 남부의 행정 및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새
로 신설된 영화역이 수원의 관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 영화도에는 영화역(迎華驛)·낙생역(樂生
驛)·구흥역(驅興驛)·금령역(金嶺驛)·좌찬역(佐贊驛)·분행역(分行驛)·무극역(無極驛)·과천읍참
23)
(果川邑站)·수원본참(水原本站)·해문역(海門驛)·가천역(加川驛)·강복역(康福驛)이 소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천역(果川驛)과 영화역이 새로 설치되고, 청호역은 장족역·동화역과 함께 혁파된 것
이다.
그러나 한양에서 충청과 전라는 물론 추풍령을 경유하여 경상우도를 다녀오는 길은 여전히 수원의
영화역을 지나 옛 청호역 일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까지 오산의 청호역 일대는 인구와
물자의 이동이 증가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이 일대에 장시와 주막(酒幕)이 활발하게 운영되게
24)
하였다. 오산의 청호역 일대는 중앙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장시가 활성화되고 주
막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변화 속에 발전하고 있었다.
제2절 왜란과 호란을 이겨낸 오산 사람들
1. 임진왜란과 의병항쟁
고려시대 이전에 형성된 수원부의 옛 읍치는 읍성과 산성체제를 갖춘 형태로 화산(花山)과 독산(禿
山)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거쳐 조
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산성의 존재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조선 초기 수원의 고성(固城)으로
인식되고 있던 독산성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7리 되는 곳에 독성산(禿城山)이 있다.’는 기록
25)
을 통해 확인된다. 이것은 이미 ‘독성(禿城)’이 하나의 지명이 되었고, 그 아래 ‘산’이 붙은 형식으로
단순하게 독성이 자리 잡고 있는 산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6)
조선시대 독산성이 위치한 수원부가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된 것은 세종대에 한양 도성과 경기를
수호하는 군사적 기능이 강조되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였다. 도호부란 도성과 지역을 수호
한다는 군사적 기능이 강조된 군현의 명호(名號)이다. 수원도호부는 조선의 군사체제가 중앙의 오위
제도와 지방의 진관체제로 정비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 서남부를 방어하는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 것
오산시사 이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하지 않던 시대의 산성은 주목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독산성이 경기 남부의
요새로 산성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제
2
권
23) 『萬機要覽』 軍政篇1, 驛遞, 各道屬驛.
24) 장시와 주막과 관련해서는 <4절 2. 장시와 창의 운영>에서 서술한다.
2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경기, 수원도호부, 산천.
136 26) 심승구, 「임진왜란 중 독산성 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전술적·전략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37, 2012,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