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한눈으로 보는 오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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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에 들어간다.
오산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금암동 고인돌을 비롯하여, 외삼
미동, 지곶동, 가장동에서 확인된 몇몇 고인돌 유적만 알려
져 있었지만, 최근 대규모 택지개발과 이에 수반된 발굴조사
가 이루어지면서 집터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유적이 확인되
고 있는 상황이다. 발굴결과를 살펴보면 현재는 세교 신도시
로 개발된 오산 내삼미동, 궐동, 청학동, 탑동 일원은 원래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낮
은 구릉상에 자리 잡았던 유적은 모두 사라졌으며, 그 자리 호 주거지의 연대는 서기전 10~9세기로 나왔다.
에는 높은 고층 아파트와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탑동·두곡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집터 10기, 구덩이 2기, 무
오산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금암동 고인돌을 비롯하여, 외삼 덤 6기(지석묘1, 석관묘2, 석개토광묘2, 옹광묘1)가 발굴되었
미동, 지곶동, 가장동에서 확인된 몇몇 고인돌 유적만 알려 으며, 철기시대 옹관묘도 1기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마을 구
져 있었지만, 최근 대규모 택지개발과 이에 수반된 발굴조사 성에서 주거지뿐만 아니라 무덤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
가 이루어지면서 집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유적이 보고 다. 이 유적의 지석묘와 석관묘 등 무덤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되고 있는 상황이다. 발굴결과를 살펴보면 현재는 세교 신도 속하는 것으로, 주거 가운데 일부도 같은 시기에 공존한 것이
시로 개발된 오산 내삼미동, 궐동, 청학동, 탑동 일원은 원 다. 넓은 의미의 마을고고학에서는 생활영역인 가옥과 사후영
래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인 무덤, 그리고 생산, 저장, 의례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경향
내삼미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걸치는 집터 이 강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탑동, 두곡동유적은 앞
40기가 발굴된 대규모 유적이다. 규모가 가장 큰 집터는 길 서 설명한 주거지로만 구성된 내삼미동유적과는 성격이 다르
이가 22m에 달하며, 너비는 3.3m이다. 이 유적에서는 주거 다. 마을의 발전 과정에서 무덤의 등장, 그리고 군집화는 농
지와 구덩이 등에서 토기와 곡옥, 석기 등 유물 총 362점이 경사회의 정주도와 관련된다는 연구가 있다.
나왔다. 이 유적의 주거지 40기가 모두 같은 시기에 존재하 오산 청학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무덤과 의례공간
지는 않았으며, 동시기에 공존한 가옥의 수는 20여 동을 넘 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목관묘 1기만 조사되었으며, 내부에서
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산지역 마을의 형성과 발전이 는 점토띠토기 1점과 흑색간토기목긴항아리 2점이 나왔다. 무
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내삼미동유적은 최초의 마을로 볼 수 덤과 다른 구역에서 확인된 의례공간은 타원형의 도랑을 판
있을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앞선 시기의 마을 유적이 새롭 환구(環溝)를 말하는 것으로 그 내부에서 집터 등 생활 유구의
게 발굴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절대연대가 측정된 14호, 17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주거공
간을 감싸면서 경계나 구획, 또는 방어시설로 사용된 환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도랑 시설은 경
기남부지역에서 많이 확인되는데, 특히 수원, 화성, 오산지역
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의례시
설을 하늘과 관련된 천신숭배와 연결시키는 연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