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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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 안녕동의 수원고읍성을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백제는 큰 마을의 이름을 한성(漢城), 아단성(阿                                          37
                  旦城) 등으로 불렀음에 근거한다.                                                                              생활환경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장수왕 63년(417년)에 있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이 군사 3
                  만 명을 이끌고 백제에 침공하여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제왕 부여경(夫餘慶)을 죽이                                           /  지명유래

                  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는 기사이다.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이르러 백제 구원(狗原, 수원들)과 독산성(禿山城)은 고구려 매홀군

                  (買忽郡)이 되었다. 물벌 또는 벌물로 불리던 백제 구원의 이름은 매홀(물골)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오산천과 황구지천이 고구려 매홀군의 중심 하천이었다는 기록이다. 매홀초등학교와 매홀중학교, 벌

                  말초등학교와 수청초등학교에 고구려 매홀군의 흔적이 남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왕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명주, 전

                  주, 무주의 9주 117군 293현을 두었다.”고 기록하였다. 경덕왕은 한반도의 영토를 9주 5소경으로 확
                  정하였는데, 이때에 우리 고장 오산의 명칭은 한주(漢州) 수성군(水城郡)이었다. 지금의 수성고등학

                  교와 성호고등학교에 그 흔적이 남았다.





                  6. 고려시대


                    『고려사』 태조 17년(934년)에 왕은 수성군을 높여 수주(水州)로 격상시켰다. 태조 왕건이 수성군을
                  수주로 격상시킨 데는 수성군 토호들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었다. 후백제를 치기 위하여 고려군이 남
                  진할 때 수성군의 토호 김칠, 최승규 등 2백여 명이 왕건을 도왔다. 이에 태조 왕건이 고려 건국을 지

                  원한 수원 김씨와 수성 최씨 가문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였던 것이다. 선경직물 대표 최종건, 선경그

                  룹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 최태원 등이 수성 최씨의 후손이다.
                    고려 성종 14년(995년)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설치하였다. 이후 목종 8년(1005년)에 혁파되었
                  다. 이때 고을의 별칭이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현종 9년(1018년)에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가 설치되었다. 정송현(貞松縣, 화성

                  시 팔탄면), 용성현(龍城縣, 평택시 오성면), 광덕현(廣德縣, 평택시 현덕면), 쌍부현(雙阜縣, 화성시
                  우정면·장안면)이 수주(水州)의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문종 23년(1069년)에 양광도에 속한 한양, 교하, 해주, 양천, 금주, 남양, 수원 등의 주현을 경기도

                  에 두었다.

                    원종 12년(1071년)에 수주를 도호부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水原)으로 개칭하였다.
                    고종 19년(1232년) 12월에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수원도호부의 처인부곡(處仁部曲, 용
                  인시 처인구)에 이르렀다. 몽골군은 도성 개경(開京)과 남경(南京, 한성)을 함락시키고 수원으로 이동

                  하던 길이었다. 지금의 오산시 독산성과 화성시의 수원고읍성으로 진격하던 길이었다.

                    당시는 고려의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진 상태였으므로, 중앙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경에 이어 수원까지 몽골군에게 함락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수원도호부 처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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