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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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독립만세운동
1. 오산장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정
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한민족은 분연이 일어나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서울 파고
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
다. 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홍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 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유진홍은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이었다. 곧 오산으
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
합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규합되자 의거할 것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오산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최초 시위운동의 움직
임이 있었으나 일경의 경계로 거사되지 못했다. 일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결정치 못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3월 25일과 26일 양일에는 오산리의 독립만세운동이 오산공립보통학교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
며 전개되었다. 이때 일경이 총을 발사하여 3명의 총상 중경상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2건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이 경계를 강화했다.
이후 3월 29일 오산장날(당시 음력 2월 28일-당시는 음력으로 3, 8일에 오산장이
열렸다. 1937년을 기준으로 이전은 음력, 이후는 양력에 장이 열렸음.)에 오산장
중 우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이날은 수원군 지역인 수원면,
태장면, 안용면 등에서도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성호면 오산리에서는 관공서와
민가 13채가 파괴되고, 일본병이 출동하여 2명이 붙잡혀 가고 일본병의 발포로 약
간 명의 부상이 있었다. 오후 3시쯤 오산장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을 유진
홍(兪鎭弘)과 안낙순(安樂順) 등이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5시경에는 이들은 오산장 우시장에서 출발
하여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
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喜市)가 해산을 요구하자, 시위 군중
은 이에 불응하고 만세소리를 더욱 높였다. 유진홍, 안낙순 등 3명의 주동자를 체
포하자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높이자, 이에 기가 꺾인 오오키는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李成九), 이규
선(李圭璇),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김용준(金用俊), 유진홍(兪鎭弘)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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