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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오산천명 변천 과정 61
생활환경
오산시의 젖줄은 오산천이다. 오산시의 발전에 있어 오산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선사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산천은 오산시민의 식수와 생활용수,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로 긴요하 / 지명유래
게 이용되었다. 옛 문헌을 중심으로 오산천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다음은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찾은 오산천 관련 문헌이다.
1481년, 성종(成宗) 12년에 강희맹, 노사신, 서거정, 양성지 등이 정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
覽)』에 수원부(水原部) 오산원천(烏山院川)이란 기록이 등장한다. 오산천변에 왕이 머무르는 오산원
(烏山院)을 두었다는 기록이다.
1611년, 광해군 3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오산원천(烏山院川)이란
내용이 나온다.
1682년, <동여비고(東輿備攷) 백제강역북변지도(百濟疆域北邊地圖)>에서는 오산천을 고산천(孤山
川)으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고’의 ㄱ탈락 음으로 보아 ‘오’로 본다. 예를 들면 고구려 매홀군(買忽郡)
이 그것이다. 매홀(買忽)의 ‘홀’은 ‘골’의 ㄱ탈락 음으로 보아 ‘올’이다. ‘고’의 장음은 ‘고오’이고, 골의 장
음은 ‘고올’이다.
1789년, 정조(正祖) 1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의 산천조에는 오매천(烏梅川)이다. 오산(烏山)과
매홀(買忽)을 합성한 이름으로 판단된다.
1800년, 순조(純祖) 연간에 발간된 <여지도(輿地圖)>에는 오천(烏川)으로 표기되었다.
1831년, 순조 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서는 다시 오매천(烏梅川)으로 표기하였다.
1834년, 김정호(金正浩)가 작성한 <청구도(靑邱圖)>에서는 토범천(兎汎川)으로 표기되었다. 토(兎)
는 예전에 오(烏)와 같이 쓰였다. 토는 옥토끼이고 ‘토’의 장음은 ‘토오’이다.
1835년, 김정호가 쓴 『청구요람(靑邱要覽)』에서는 토현천(兎峴川)으로 표기되었다.
1839년,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와 『화성궐리지(華城闕里誌)』는 모두 오산천(鰲山川)으로 표기하
였다. 궐리지의 ‘궐리’는 궐리사가 위치한 오산시 궐동의 지명이다.
1849년, 헌종 15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용인현 갈천(葛川)의 하류는 오산천(烏
山川)이고, 남으로 흘러 진위현 장호천(長好川)에 합류한다. 다라(多羅) 고비진(高飛津)이다.”고 기록
한다.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대동여지전도>, <여도비지(輿圖備志)>에서는 한 사람이 썼
는데도 토현천, 토범천, 오매천으로 기록하였다.
1863년,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오산천(烏山川)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오산장(烏
山場)이 3일과 8일에 열린다고 하였다.
1891년, 『용인읍지』에 오산(鰲山), 원천(院川)이란 기록이 나온다. 오산천 주변에 오산원(烏山院)이
있었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