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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檢閱), 도시(都試), 훈련, 군기 제조 및 조달 등이 대부분 계수관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세조대 113
진관 체제가 시행된 이후로 계수관의 군정 기능은 소멸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지방의 민정 및 군 역사
정의 행정구역의 일치를 추구했다. 지방 행정에서 각 군현은 상하 위계 관계가 아니었다. 다만 진관 / 유적
체제의 토대가 계수관이었으므로 군정에서는 상하 관계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계수관 제도는 조
선 후기에도 지속되었다. 해당 지방 관내의 반역, 불효, 수령 능욕 등이 발생하면 목, 도호부, 군 등이 · 유물
현으로 읍호가 강등되었다. 이때 계수관이 대상인 경우에 새로운 군현을 계수관으로 삼았으며, 그에
따라 도명이 변경되었다. 반대로 읍호가 강등된 계수관이 읍호를 회복하고 재차 계수관으로 복구되
면 예전의 도명을 사용하였다. 충청도가 공충도 및 공홍도로 강등되거나 복설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
다. 17)
그런데 일반적으로 조선 왕조 전기를 통해 경기도에서 오산지역을 관리하던 행정 체제를 말한다면
군현제였다. 당시의 지방 체제에서 도(道)는 지방을 통치하는 군현의 상위 기구였다. 계수관은 정식
행정 단위가 아니라 한 도를 대표하는 군현을 통칭하는 용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계수관은 지방
행정의 편의상 많은 행정 영역에서 도와 군을 연결하는 중간적인 광역 행정 단위로 기능했다. 다만
계수관은 군민겸전(軍民兼全)의 직임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시대의 추이에 따라 당연히 그 분화가 추
구되고 여기에 도의 감사와 각 군현의 행정권이 강화되면서 계수관의 행정적 기능은 소멸되었다. 결
국 계수관은 군정(軍政)의 기능만을 지니게 되면서 군사 조직으로 재구축되었다. 실제로 계수관을 바
탕으로 지역 단위의 군사 방어체제인 군익도(軍翼道)가 만들어졌으며, 세조대에 이르러 군익도는 지
역 방어 전술 체제인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정착되었다. 18)
한편 계수관 제도가 지방 제도 개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조 국가의 지방 통제의 한 방편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각 도별 제도를 구축하여 국왕의 대리인이었던 관찰사의 권
한을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왕조의 지방 행정 기구를 보면 크게 도와 군현으로 구분되고 군현에는 읍
격에 따라 부윤부, 목, 대도호부, 도호부, 군, 현의 등급이 있었지만, 상위 군현이 하위 기관을 통솔하
지는 않았다. 행정상으로 모든 군현은 도를 통하여 조정에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으며, 도의 관찰
19)
사로부터는 감찰을 받았다.
그런데 양광도가 경기도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경기 좌우도로 존재하는 행정 개편의 과정이 있었
다. 조선왕조 초기에 경기도를 좌우로 나누자고 한 것은 도평의사사였다. 도평의사사는 고려시대 국
사를 전담하던 곳으로 태종 즉위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의정부가 신설되면서 폐지되던 국정 최고
기관이었다. 태조대의 경기 지방제도의 개편시 도평의사사에서는 경기도 각 고을의 정치 및 경제적
규모와 지리적 분포에 따라 좌우도로 개편하였다. 즉 경기 좌도는 장단(長湍)·파평(坡平)·현주(見
州)·사천(沙川)·포주(抱州)·풍양(豊壤)·서원(瑞原)·행주(幸州)·심악(深岳)·한양(漢陽)·부원
(富原)·과주(果州)·철원(鐵原)·영평(永平)·승령(僧嶺)·삭녕(朔寧)·적성(赤城)·임강(臨江)·마
17) 『조선왕조실록사전』, 계수관 참조.
18)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 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44~72쪽.
19) 『경국대전』,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