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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1 The Panama Canal
Background Knowledge
1. 파나마 운해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크리스토발까지 전장 64km. 카리브해(海)로 흘러드는 차그레스
강(江)을 막아 축조한 가툰호(면적 약 420 km2) 안에 만들어진 34km의 수로 및 파나마만(灣) 쪽의 미
라플로레스호(湖) 안에 만들어진 1.6 km의 수로와, 이 두 호수 사이에서 지협의 척추 구실을 하는 구릉지
를 15km나 파헤쳐 만든 쿨레브라 수로(에스파냐어로 „새우‟라는 뜻, 굴착 감독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게일
라드 수로라고도 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표고(水面標高)는 25.9 m, 미라
플로레스호의 수면표고는 16m이다. 이 두 호수 사이의 표고차는 물론 호수와 해면(海面)의 표고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갑문방식(閘門方式)이 이용되고 있다. 파나마만에서 미라플로레스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식(二段式) 미라플로레스 갑문, 여기에서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
가툰호에서 카리브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이 건설되어 있다.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만 5000척,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약 8시간이 걸린다.
2. 파나마 운하 사건
공화국의 두 번째 위기는 파나마 운하 사건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던 레셉스는 1880년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민간 회사를 설립하여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1881). 그러나 상상 이상의 난공사, 자금
고갈, 말라리아와 황열병의 위협 등으로 인해 1889년 이 회사는 파산하고 운하 건설은 중단되었다.1) 회
사가 파산한 이후 정부의 조사 결과 금융계와 정치계에 뇌물 공여로 레셉스는 기소당했으나 말년의 추문에
상관 없이 명성을 누렸다. 한편, 이 유명 무
실한 파나마 운하 회사로부터 정부의 각료들
과 국회 의원들이 뇌물을 주고받은 사실이 폭
로되자, 공화국의 적들은 일제히 정부를 공격
하고 나섰고, 따라서 공화국 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특히, 『유대 프랑스(France
juive)』라는 반유대 팸플릿의 저자 에두아르
드뤼몽(Edouard Drumont)은 유대계 금융
자본가들이 추문에 많이 연루되었음을 강조하
여, 프랑스에서의 반유대 정서를 더욱 부채질
했다. 그리고 3년 후에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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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Knowledge
1. 파나마 운해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크리스토발까지 전장 64km. 카리브해(海)로 흘러드는 차그레스
강(江)을 막아 축조한 가툰호(면적 약 420 km2) 안에 만들어진 34km의 수로 및 파나마만(灣) 쪽의 미
라플로레스호(湖) 안에 만들어진 1.6 km의 수로와, 이 두 호수 사이에서 지협의 척추 구실을 하는 구릉지
를 15km나 파헤쳐 만든 쿨레브라 수로(에스파냐어로 „새우‟라는 뜻, 굴착 감독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게일
라드 수로라고도 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표고(水面標高)는 25.9 m, 미라
플로레스호의 수면표고는 16m이다. 이 두 호수 사이의 표고차는 물론 호수와 해면(海面)의 표고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갑문방식(閘門方式)이 이용되고 있다. 파나마만에서 미라플로레스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식(二段式) 미라플로레스 갑문, 여기에서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
가툰호에서 카리브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이 건설되어 있다.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만 5000척,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약 8시간이 걸린다.
2. 파나마 운하 사건
공화국의 두 번째 위기는 파나마 운하 사건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던 레셉스는 1880년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민간 회사를 설립하여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1881). 그러나 상상 이상의 난공사, 자금
고갈, 말라리아와 황열병의 위협 등으로 인해 1889년 이 회사는 파산하고 운하 건설은 중단되었다.1) 회
사가 파산한 이후 정부의 조사 결과 금융계와 정치계에 뇌물 공여로 레셉스는 기소당했으나 말년의 추문에
상관 없이 명성을 누렸다. 한편, 이 유명 무
실한 파나마 운하 회사로부터 정부의 각료들
과 국회 의원들이 뇌물을 주고받은 사실이 폭
로되자, 공화국의 적들은 일제히 정부를 공격
하고 나섰고, 따라서 공화국 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특히, 『유대 프랑스(France
juive)』라는 반유대 팸플릿의 저자 에두아르
드뤼몽(Edouard Drumont)은 유대계 금융
자본가들이 추문에 많이 연루되었음을 강조하
여, 프랑스에서의 반유대 정서를 더욱 부채질
했다. 그리고 3년 후에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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