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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의 슬픈 역사
이렇게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강제 이주를 당한 한인들
은 초기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중
앙아시아 국가에 정착하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러시아, 우크라
이나, 벨라루스 등으로 다시 옮겨간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현
지에서는 한인들을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스탈린 시절의 강제이주는 이렇게 이루어 졌지만, 사실 러시
아와·독립국가연합 한인의 이주는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시작
한인 이민의 슬픈 역사 되었다. 1860년에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조약으로 러시
아는 우수리 강 동쪽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
중앙·아시아 고려사람들 와 조선은 처음으로 인접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에 발생한 한반도 북부지역의 대기근은 러시아로
의 대규모 이민을 일으켰다. 이민자들은 황무지와 같은 땅을
개간하고 소작인, 또는 농업노동자로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
였다. 그러나 러시아 짜르정부는 러시아인의 이주를 통한 개
발을 장려하였고 러시아인과 한인의 인구증가는 경작할 토지
를 둘러싼 경쟁을 일으켰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은 경쟁으
로부터 한인을 배제하기 위해 더 이상의 한인의 이주를 금지
요한 충분한 준비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비좁은 차량에 연료, 의 ▲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
하고 이미 정착한 한인을 내륙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
료, 식량 외의 다른 소지품을 가져갈 수 조차 없었다. 두고 간 재산에
우게 되었다. 1884년에 체결한 ‘조로수호통상조약’에서는 러
대한 보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이주하려고
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법적 지위와 이주를 통제할 수 있는
할 경우에는 이적행위자로 간주되어 처벌받았다. 카자흐스탄 인민
근거를 마련하였다.
위원회는 1938년 3월에야 이주민에게 정주구역을 정해주었으며 경
제활동 재개에 필요한 도움은 물자의 결핍으로 줄 수 없었다. 스탈린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는 처음에는 경제적 문제로 촉발되었
의 집단화 정책의 희생자였던 중앙아시아의 인민들은 수천 가구의 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연해주 지역을 독립운동 전
한인 이주민의 생활보장을 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진기지로 삼기 위한 이주가 시작되었다. 독립운동가, 지식인
들이 고국 땅을 넘어서 이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정
지금의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 한인들에게 1937년 8월 21일은 자 생면부지의 이역만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 후 한인들에게
치망명, 독립운동 성격을 띠는 이주는 조선에서 일제의 탄압
신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비극의 날이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극 는 이주 과정보다도 훨씬 힘든 생활이 이어졌다. 이주민들은 새로 형
이 심해지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가장 큰 규모의
동 연해주지역의 한인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성된 집단농장에 거주하였는데 1939년 초 카자흐스탄 전 지역에 총
이주는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발생했는데 이들의 대부분
로 집단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소유물, 농기구, 동물 등을 소지 70개의 한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어 8,037가구 35,724명이 거주하
은 연해주 지역에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한인에 의한 개발은
할 수 있고, 재산은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한다고 하였으나 이주에 필 였다.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어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카자크스탄 알마티(Alm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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