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월간사진 2017년 7월호 Monthly Photography Ju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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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민선_최종_월간사진 2017-06-22 오후 1:32 페이지 1
Special 3
사진을 그리다 # 작지만 소중한 발견
<살갗의 무게> 시리즈의 시작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레니엄을 코 앞에 둔 시
점,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코팅 용지 형태의 주민등록증을 플라스틱 재질로 교체
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흥미로운 뉴스를 접했다. 새롭게 바뀐 주민등록증이 아세톤 같
이해민선은 사진의 표면을 녹여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
은 일상적 화학약품에 취약해 너무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사회를 작동시
낸다. 견고한 줄로만 알았던 사진이 무참히 무너져 내린
키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신분증)가 대수롭지 않은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순간, 뜻밖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살갗의 무게>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그 뉴스를 모티브 삼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다
가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과의 조우.
양한 재료를 이용해 지워보기 시작했다.
에디터 | 김민정 · 디자인 | 서바른
# 붓 터치로 되살린 이미지
작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완성된다. 첫째는 화학약품으로 녹아내린 이미지 위에 과감한
붓질을 더해 기존 형상을 가늠할 수 없는 추상적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녹아내린 잉크를 물감 삼아 다시 세밀하게 그림을 그린 작업이다. 결과물은 이미지를 녹
여내는 과정에서 붓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미지가 프린트 된 재질
역시 중요하다.
#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
인화된 사진 표면을 녹여서, 그 이미지로부터 생성된 잉크로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떤
규정을 흩트려 놓는 행위다. 페인팅 작업은 작가가 하려는 말을 전달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
과 과정이 요구되는 말더듬이 같은 작업이다. 반면 사진은 즉각적인 매체다. 사진은 어떤
표면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돌산이 인화된 사진을 녹여 채석장을 그리고, 강 이미지를 녹여
내는 행위는 결국 존재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 일상 속의 예술
예술작품이란 삶 안에 있다. 자신 안에서 나오는 부산물 같은 것이다. 작업을 위해서 무엇
을 한다기보다 살면서 어떤 것이 보이면 좀 더 오래 보고 깊이 생각해서 작업으로 연결시
킨다. 같은 동네에서 매일 보는 풍경이 절대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 날씨, 시간 등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풍경의 질감이 달라진다.
# 딴짓의 미학
사진은 가보지 않은 곳을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매체다. 직접 촬영한 사진 대신 관
심 가는 공간을 타인의 눈으로 기록한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한 이유다. 화가인 나에게 <
살갗의 무게>는 일종의 딴짓이다. 조금씩 틈틈히 쌓아온 작업이다 보니 어느 순간 결론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2015년 전시 형태로 마무리했다. 앞으로 인공과 자연의 중간
지대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선보일 예정이다.
이해민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회화를 중심으로 사진, 설치, 영상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해왔
다. 주요 개인전으로 2008년 <덜 줄은 자들_직립 식물>(쌈지 논밭 갤러리), 2013년 <물과 밥>(아
마도 예술공간), 2015 <살갗의 무게>(합정지구) 등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하나은행, 삼성화재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