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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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저를 구하신 주님, 제 남은 생을 모두 바칩니다’ 22) 당시 포로수용소에 열병이 돌아 무수한 포로들이 열병에 걸려 죽어나갔습
니다. 중공군도 죽어나갔습니다.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해야 할
제 위생병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치우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쌓
2 장 우리 교회의 창립 목회자인 공삼열 전도자께서는 6.25라는 엄청난
동 아 현
북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숨막히도록 거룩한 은혜를 여러 여가는 시체가 썩어 그 끔찍한 냄새가 포로수용소에 진동했습니다.
차례 입은 뒤, 마침내 자신의 남은 생 전체를 주님께 바친다는 위대한 그 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시체를 처리하는 일에 자원했습니다. “하나님
결단을 내리셨다. 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워 할 일이 없어!”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 대
특히 이 ‘은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그 뒤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열병
속에서 어떻게 당신의 영적인 ‘자녀’를 보호하고 이끄시는지 극적으로 으로 죽은 시체를 직접 만지고 옷가지를 벗기고 후속처리를 하는 등 위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인도 아래 자신을 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면서도 이 무서운 전염병은 나에게 전염되지 않았
죽이고 진정으로 남을 위해 헌신할 때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군’의 습니다. 이런 사실은 중공군 상부에까지 보고되었습니다. 당시 포로 가운
지휘관마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감화되는지 보여준다. 데 예수쟁이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미 나도 ‘예
수쟁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강제노역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7월 29일 학도병으로 차출됐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정전회담에서 “포로교환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습니다. 그리고 일 주일 만에 북한 인민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해야 했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쟁이들은 그 교환포로 명단에서 제외
습니다. 인민군의 총탄이 정말 비오듯이 엄청나게 퍼부었지만 나는 무사했 된다“는 나쁜 소식이 꼬리표처럼 붙어서 전해졌습니다.
습니다. 오히려 나는 총탄이 나를 피해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앞과 그런데 제 이름이 최종적으로 교환 명단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뒤에 있는 전우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나머지 다른 전우들도 모두 나를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저는 조국 땅에 돌아올 수 있
쓰러져갔습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게 되었습니다.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그 뒤로 이어진 많은 전투에서도 나는 살아남았습니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이런 일들에 저는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눈물로 감사와
다.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소속한 3사단 25연대는 치열한 전 찬양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
투에서 전멸하는 상태에 이르러 소총부대에서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다.
그 뒤 9사단 30연대의 백마부대에 편입되어 수색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 “앞으로 저의 남은 생애, 모두 주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니다. 수색대는 참으로 위험한 작전을 해야 하는 부대입니다. 적의 후방까
지 침투하여 적의 정보를 탐지하고 적 진영을 뚫고 돌아오는 어려운 임무
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16번 임무에 투입돼 적의 정보를 탐지하고
귀환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다가 17번째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공군 수색대
에 잡혔습니다. 그 뒤 평안북도 우시군에 있는 중공군 포로수용소에 수감
되었습니다.
22) 공삼열 목사가 사역을 할 수 밖에 없는 간증 내용을 재정리함
78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