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2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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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심자 가정을 심방해 가정 사정도 파악하고 제대로 신앙을 길러 대략적으로 보면, 창립 당시 간신히 20명 선을 유지하던 교세가 1
갈 수 있도록 이끄셨다. 심방가정에서도 성경을 가르치셨다. 또한 동 년 뒤인 1963년 안정적인 30명대 수준으로 커나갔고, 그 이듬해인
제
2 장 네를 돌며 노방전도를 하는 데도 열심히 나섰다. 그는 어린이로부터 1964년에는 30대 후반의 인정기조를 유지하다가 1965년에 이르면
동 아 현
북 장년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직접 대화하며 전 40명선을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도하는 데 열성을 쏟았다. 당시 공 전도자의 사모께서 북아현동에서 이런 기조를 오늘날 대형교회에 익숙한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미
약과공장을 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남은 약과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약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판자집에 셋방살이를 전전하면
시 대
약과는 아낌없이 전도를 위해 투입됐다. 사모님이 약과 공장을 하시 서 이뤄낸 결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그 무엇’
며 남대문 시장에서 매매하셨는데, 거기서 남거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인가가 있다.
약과는 다 어린이들을 위한 전도 용품이 되었다.
두 전도자의 분투와 노력으로 서서히 교회는 조금씩 자라나는 모 가난한 우리 교회는 다행히 1965년엔 셋방살이를 면하게 된다. 판
습을 이어나갔다. 불충분하게나마 남아 있는 예배일지 자료에 따르면 자집 신세도 벗어난다. 이영진 전도자의 건축헌금으로 굴레방다리 한
우리 교회 참석 교인 수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성중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고친 뒤 예
배를 올리게 된 것이다. ‘자립교회’가 된 것이다. 외형적인 이런 결실
일시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삼일 밤 예배 비고 의 반영일까? 우리 교회 창립 4년을 맞은 1966년, 1월 첫 주일예배 참
남자8명 남자14명
1962년 1월 28일 석자는 49명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무렵 예배를 돕는 봉사자도
여자10명 여자15명
창립예배
합18명 합29명 안점석, 민영윤, 남궁달 집사 등이 포진하는 등 제법 체계가 갖추어진
남자12명 교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1962년 01월 31일 여자8명
합 20명
남자18명 하지만 이런 외형상의 성장이랄까 변화의 밑바탕에선 아직도 우리
물얼룩으로
1963년 월 일 여자14명
날짜 불명확 교회의 시련이 끝나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새로운 고난과
합32명
남자22명 남자17명 시련의 시기가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2월24일 여자24명 여자19명
우선 변화의 단초가 된 것은 창립 전도자들의 이상주의적 목회철
합46명 합36명
남자19 학과 현실의 부조화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두 분은 정말 훌륭하
1964년 2월27일 여자19
게 우리 교회를 세우고 키워오셨지만, 아직 우리 교회가 안정되고 제
합38명
남자23명 남자12명 대로 서면서 성장하려면 초기의 강력한 리더십이 조금은 더 유지돼야
1965년 1월3일 여자20명 여자17명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합43명 합29명
남자10명 두 분 전도자는 원래부터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
1965년 1월6일 여자16명
는 일을 가장 절박한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우
합26명
리 교회를 아주 오랫동안 섬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고 볼 수 있
다. 이영진 전도자의 경우 ‘공동사역’을 제안했을 때부터 이런 신앙의
자세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세워 공동사역을
82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