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일산교회 60주년사
P. 87
참석인원은 55명(남24, 여31) 으로 집계되고 있다. 침체된 교회 모습 에 의해 1949년 5월22일에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돼 갔던 것이다. 교회와 인연을 맺으셨다. 성경말씀에 박식하고 능통
제
2 장 최광석 전도자가 심혈을 기울인 주요 대상은 학생회다. 최 전도자 하여 이단을 물리칠 정도였다. 늘 확신에 찬 말씀으
북 는 학생들이 예배에 적극 참여토록 독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로 성도들을 감동시키곤 하셨다.
동 아 현
그 예로 매월 마지막 주일 오후예배는 학생회 헌신예배를 올리고, 저 임 목사는 우리 교회 초대 목회자가 이루어놓은
25)
녁 예배는 ‘통상의 밤’을 개최했다. 또한 늦가을엔(주로 11월 초순) 기반이 다소 흔들렸던 시기에 오셔서 말씀으로 성도
시 대
26)
‘영상의 오솔길’이란 제목으로 문학의 밤 행사를 진행하면서 교회 들의 마음을 일으키는 큰 역할을 하셨다는 평가를
임봉수목사와 안점석, 이상호집사
예산으로 비교적 많은 경비를 지원해주셨다. 더 파격적인 것은 오후 받는다. 임 목사는 매년 교회 운영방침을 공개하여
예배나 수요예배 때 학생들에게 예배위원으로서 대중기도(오늘날의 성도들이 사역에 동참토록 잘 안내해 주셨다. 그리
대표기도)를 맡기셨다. 지금의 예배 문화로는 생각도 못할 정도의 파 고 우리 교회 최초로 네 분의 장로를 장립하셨고 믿
격적인 일이지만, 당시 이런 시도는 다른 한편으로 가족예배 같은 분 음의 공동체에서 그 유기적인 조화와 협력이 더없이
위기 속에 또 다른 은혜가 넘쳤다고 회고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다. 필요한 교회의 조직체계도 잘 확립했다. 제직회, 각
최 전도자의 가족 거주공간은 좁은 교회 안이었기에 생활하기가 적지 부서, 구역집회, 교회학교 등의 체계가 제대로 세워
않게 불편했다. 최 전도자의 어린 딸이 농아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사모 졌다. 원칙과 기준을 중시하는 목회를 구현하고 실
님 얼굴이 늘 수심에 차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하는 이도 있다. 안타까운 천하셨다.
임덕희 전도자 졸업식 (1971년도)
점은 최광석 전도자의 목회스타일이 독단적인 면이 있는데다가 성도들 임 목사는 성경의 초대교회 모습처럼 그리스도의
사이에 목회자에 대한 호불호가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 교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에 따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환
속에서 결국 최전도자는 3년 만에 우리 교회에서의 사역을 마치셨다. 원운동을 주창하셨다. 성만찬 예식과 성령운동, 말씀 세움을 주요 목
회방침을 세우고 시행하셨다.
임 목사는 원래 악기를 쓰지 않는 우리 교회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3) 1970년대의 목회 현황 - 성장 동력의 목회 얼마나 찬양을 은혜롭게 올릴 수 있는지 구현해내셨다. 그동안 그리
스도의교회는 찬송에 악기를 쓰지 않기에 찬양이 좀 밋밋한 편이었
임봉수 목사 27) 다. 임 목사는 ‘찬송가 바르게 부르기’와 가스펠송을 많이 지도해주셨
다. 이 때문에 보다 더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송과 찬양에 목말라하던
임봉수 목사는 대구그리스도의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71년 6월 우 성도들이 매우 좋아했다. 임 목사는 성악에도 달란트가 있어서 악기
리 교회에 오셨다. 그리스도의교회를 초기에 전파하신 동석기 전도자 없이 아카펠라로 찬양을 리드하시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가 넘치곤 했
다. 그는 성도들이 찬송과 찬양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제대로 부르
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격려하셨다.
25) 통상의 밤은 2명~4명의 학생 연사가 성경적 주제를 갖고 간증적 토론을 하며 은
혜를 나누는 시간 “천국 가면 주님 옆에서 찬송 부를 일 밖에 없어요!”
26) 1967년 11월3일 제1회 문학의 밤이 열리고 그 뒤 매년 행사가 끊이지 않고 노량
진 시대까지 26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27) 임봉수 담임 목회자가 취임하면서 전도자 호칭에서 목사로 바뀌게 됨. 임 목사는 강단에 평신도도 세워 말씀을 증거하도록 허용하셨다.
86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