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김연식 초대전 2023. 9. 28 – 10. 7 갤러리모나리자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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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왑 - 무작위의 작의를 실현하는 전환의 미학
김 성 호 (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정산 김연식은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고 하는 거대 화제(畫題) 아래 올해 5개의 연작 전시를 마치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처럼 선보인다. 그는 한자어 인다라망을 산스크리트 원어에 가까운 발음인 ‘인드라(Indra)’로 표기함으로써 이 화제에 담긴 원의
(原意)를 강조한다. 그것은 다음처럼 구성된다: 제1악장 컵 속의 무한세상(5월), 제2악장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6월), 제3악장 스
왑(9~10월), 제4악장 달과 바람과 그리고 구름(11~12월). 정산은 제3악장으로 대별하는 이번 전시의 테마를 ‘스왑(swap)’으로 제
시했다. 스왑은 흔히 “(어떤 것을 주고 그 대신 다른 것으로) 바꾸다, (이야기 등을) 나누다” 혹은 “(일을 서로 바꿔 가면서) 교대로
하다”라는 사전적 정의를 지닌 말이다. 전환(轉換), 공유, 교감, 교환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 ‘스왑’은 정산의 근작을 이해하는 출발점
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II. 스왑 – ‘채움에서 비움으로의 전환’ 혹은 공유
정산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추상 회화 작업의 면모는 다양하다. 그의 추상화는 번짐과 마블링 효과가 극대화된 표현주의 추
상, 물감의 마티에르가 화면을 휘감고 있는 앵포르멜 추상, 캔버스의 표면 위에 드문드문 기포를 남기면서 엷게 물감을 포진시키
거나 빠른 필획과 같은 넓은 선을 남긴 모노크롬 추상으로 다양하게 불러봄 직하다.
유념할 것은, 그의 다양한 유형의 추상화에는 일련의 공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스왑’이라고 명명한 회화 창작 태도
와 그것에 따른 다양한 창작 방법론이다. 그에게 스왑은 ‘전환’이나 ‘공유’로 표상된다. 즉 일련의 창작 행위 속에 대면하고 있는 캔
버스와의 교감, 공유와 더불어 그 캔버스의 변화를 지속해서 이끄는 전환을 실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미디엄을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 위에 쏟아붓듯이 올려 ‘채움’을 실행하고 난 후, 다시 그것을 다양한 매개체를 사용해서 지우
거나, 찍어 내거나, 덜어내거나 닦아냄으로써 ‘비움’을 실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매개체란 정산이 붓 대신 사용한 회화 도구로서 종이 명함, 플라스틱 카드, 버터나이프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비닐, 얇은 순
지와 같은 것까지 아우른다. 통상적으로 얇은 두께의 이 판형(板形) 오브제들은 어떤 것들은 견고하고 어떤 것은 유연한 재질의 것
이지만, 동일하게 물감을 덜어내거나, 닦아내는 식의 빼기, 즉 비움의 미학을 실현한다.
서로 다른 색들이 굴곡진 경계를 중심으로 똬리를 틀거나 화면 속에 마루와 골을 만드는 회화는 대개 종이 명함이나 플라스틱 카
드 혹은 버터나이프로 물감의 길을 만들어 화면의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러한 회화의 창작 방식은 마치 뜨거운 마그마가 두꺼운
땅의 지층을 뚫고 용암길을 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화면을 만들거나 계곡으로부터 떨어지는 폭포수가 단단한 바위를 만나 물길
을 가르며 떨어지는 것처럼 장쾌한 화면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 다른 유형으로, 화면 중심으로부터 데칼코마니처럼 상하, 좌우 양쪽으로 물감 획의 흔적을 남긴 작품은 대개 얇은 순지를 물감
이 덜 마른 화면 위에 올려놓았다가 이내 중심의 밖으로 당겨낼 때 물감이 닦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넓은 필획을 남긴 모노크롬
추상은 또 어떠한가? 그것은 덜 마른 물감이 놓인 캔버스 표면 위를 비닐로 훔치듯이 닦아낸 것이다.
정산의 작업은 한편으로 지우면서 동시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채움’으로부터 ‘비움’으로 전환하는 것이자,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주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스왑’처럼 캔버스와 대면하면서 교감과 공유의 미학을 실현하는 것이다.
III.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무작위의 작의’
정산의 스왑 연작은 대개 불덩이가 타오르거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격렬한 화면 속 충만을 품고 있지만, 더러는 잔잔한 호수의 표
면을 응시하게 만드는 정적의 분위기를 함유하거나 메마른 대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결여를 품고 있기도 하다. 충만과 결여가 혼성
된 이미지 덩어리인 셈이다. 피상적으로 그것은 기의(signifié) 없는 기표(signifiant)라는 불구적 기호(signe)로서의 텍스트처럼 읽
힌다. 또한 그것은 텍스트의 흐릿한 자취만을 남기는 정체 미상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기의 효용성을 망실한 유령이자
이미지로 변신한 환영의 판타즈마(phantasma)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성의 이미지 덩어리는 관객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동인(動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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