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김연식 초대전 2023. 9. 28 – 10. 7 갤러리모나리자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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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ylic on canvas Acrylic on canvas
2023 2023
그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가독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이미지 덩어리가 만드는 마블링이 가득한 ‘충만’에서도 비움으로의 ‘전
환’이 실현되고 있고, 단색조의 모노크롬과 같은 회화 안에서도 이러한 전환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그의 스왑 연작
에서는 끊임없는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생성, 변화, 운동의 과정이 지속된다. 붓 대신 그의 창작에 개입하는 순지, 비닐과 같은
매개체는 회화의 변화를 우연성으로 견인한다. 순지나 비닐을 화면 위를 훔치듯 물감을 닦아낼 때, 그것이 최종적으로 남기는 흔
적은 예측 불가능하다.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덜 마른 화면 위에 밀착했다가 떨어뜨릴 때 남겨지는 물감의 흔적 또한 그러하다. 작
가가 이러한 매체를 붓 대신 사용할 때 나타난 우연한 결과는 도처에 있다.
그의 작업에서 우연은 필연과 맞물려 출현한다. 작가가 매체를 결정하고 작품에 사용하는 필연,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으로 만든
우연, 물감과 매체가 운동으로 만난 예측 불가능성이 남긴 우연, 물질이 과학적 반작용으로 남긴 필연 등 정산의 작업 안에는 필연
과 우연이 교차하되 그것은 순차적이기보다 동시다발적으로 생성, 변화, 운동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그의 회화를 들뢰즈의 입장으로 ‘~이다’(être)의 공간이기보다는 ‘~되기(devenir)’의 공간으로 부를 만하
다. 이러한 되기는 끊임없이 우리의 존재를 확정적인 것으로부터 미루어 둔다. 언제나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불확
정의 운동, 전환의 변화와 생성의 운동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의 작의(作意)가 읽힌다. 즉 정산이 스왑 연작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부러 꾸미거나 뜻
을 더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무작위(無作爲)를 지향한다. 그것은 화가와 매체가 벌이는 놀이 혹은 명상과 같은 창작 행위를 통해
우연의 길을 열어 주고 필연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산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주인으로서 자리하기보다 작업에 대한 최소한의 개
입을 통해서 마치 우주의 질서 속 조력자가 되려는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난 채 자신의 작업에 동참한다. 달리 말해 ‘무작위의 작의’
를 실천하는 셈이다.
IV. 인드라망 – 모든 것의 연(緣)
정산 김연식이 이번 전시에서 ‘채움에서 비움으로의 전환’ 혹은 공유를 선보이고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무작위의 작의’를 선보
이는 스왑 연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그가 올해 5개의 연작 전시를 교향곡처럼 구성하면서 제시하는
테마는 인드라망에 집결한다.
산스크리트어 인드라얄라(indrjala)의 한자 표기인 ‘인다라망’은 고대 인도 신화 속 인드라(Indra) 신(神)의 거주지인 선견성(善見
城)의 위를 덮고 있는 거대한 그물을 가리킨다. 이 그물은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박혀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
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든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부처가 온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
하는 말로 사용되듯이, 작가의 작품 속 인드라망의 개념은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그것은 불교 화엄 철학의 ‘연기(緣起)’의 법칙으로부터 기원한다. ‘인연생기(因緣生起, pratītya-samutpād)’를 약칭한 ‘연기’란 “현
상의 사물인 유위(有爲)는 모두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ratyaya)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고 보는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법칙’을 전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 관계를 벗어날 수 없어 생성과 소멸은 항상 관계
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정산 김연식의 작업이 채움/비움, 우연/필연을 매개하고 서로 연결하고 있듯이 말이다. 인
다라망이 함유한 연기의 법칙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생사불이(生死不異)’ 혹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우
처럼 ‘색/공, 생/사’로 극명하게 대립하는 반대항마저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내면서 존재와 부재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렇다. 불교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우주 만유 일체의 사물이 서로 무한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으
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연(緣)’을 품은 인드라망의 진리를 성찰하면서 펼치는 스왑 연작을 통해서 정산 김연식은 그의 교향곡 3악장을 완성하
고 앞으로 남겨진 4악장을 선보일 예정이다. 앞선 연작전과 더불어 이번 전시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떠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주된
동인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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