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복진오 개인전 5. 25 – 5. 31 문화공간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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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오의 조각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분절된, 파편화된, 일그러진 초상으로

                                                        고 충 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조각가들은 흙으로 형상을 빚고 형상 그대로 주물로 떠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부터 조
           각을 시작한다. 추상이 아닌 형상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작가 복진오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동안의 작업을 보면
           서 느낀 것이지만, 일부 용접해 만든 철조를 포함해서, 이런 전통적인 형상 조각에 관한 한 작가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형상 조각의 미덕으로는 사실적인 재현을, 그리고 그 본질로 치자
           면 양감(매스)을 들 수 있고, 작가의 조각은 이 미덕과 본질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불현듯 선조로 갈
           아탄다. 불현듯이라고는 했지만, 아마도 그동안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 고민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만의 형식
           에 대한 것일 터이고, 그 가능성을 선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선조는 선으로 만든 조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
           실 선은 생리적으로 조각보다는 회화에 가깝고, 소묘에 가깝고, 드로잉에 가깝다. 그러므로 평면이 아닌 입체로
           구현한, 선을 이용해 허공에 그린 공간 드로잉이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인 조각의 본질이랄 수 있는 양감을 결여
           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조각이, 선으로 나타난 회화의 주요 형식요소를 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회화적인 조각
           이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주조(혹은 소조)로부터 선조로 넘어오면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만의 형식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에 작가는 가녀린 구리 선을 뭉쳐서 형태를 만들었다. 주지하다시피 구리 선은 유연하고 부드러워서
           원하는 대로 형상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갈아탄다. 아마도 표면에서 번쩍이는 빛에
           반응하는 성질이나 차가운 금속성의 질감이 구리 선보다 더 현대적인 소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인
           리스스틸 소재는 탄성이 있어서 구리 선에서처럼 원하는 대로 형상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작가는 가녀린
           실 형태가 아닌, 일정한 폭을 가진 가녀린 띠 형태로 자른 금속판(그러므로 금속 띠)을 소재로 하는 것인 만큼 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이겠지만, 그렇게 찾아낸 방법이 엮음이다. 띠 혹은 줄을 엮어서 형태를 만드
           는 전통적인 방식에 착안한 것인데, 그러나 그 방식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탄성과 함께 날카로운 표면 질감을 가
           지고 있는 소재를 일일이 손으로 엮어서 지금처럼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동
           집약적인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시행착오와 함께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과정이 뒷
           받침되어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유자재한, 자연스러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스테인리스스틸 띠를 엮어서 사람 얼굴을 만들고, 몸통(토르소)을 만들고, 해골을 만들고, 사물 형
           상을 만든다. 엮는 방식은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인데, 마치 무수한 비정형의 선이 모여
           형상을 만들고 볼륨을 암시하는 연필소묘에서처럼 베이스로 가지고 있는 해부학적 지식을 믿고 감이 이끄는 대
           로 그린 것 같은(그러므로 만든 것 같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왜 엮음인가. 엮음에 무슨 의미
           라도 있는 것인가. 여기서 엮음은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선 내가 있어야 하고, 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나와 네가 어우러져 나를 만든다. 무슨 말인가. 너와의 관계가 나를 만들고, 타자와의 관계가 나를 형성시
           킨다. 후기구조주의에선 주체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본다. 그렇게 작가가 빗어놓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타자와의 관계망으로 빼곡하다. 여기서 나는 동시에 너이기도 하고, 주체는 잠재적인 타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양가적인 주체를 작가는 잊힌 초상이라고 부른다. 익명적인 초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는,
           그러므로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엮이고 섞인 관계를 내재화하고 있는 현대인의 초
           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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