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전시가이드 2024년 10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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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이드 쉼터


        빈자리


        글 : 장소영 (수필가)


































        사과를 꺼내 씻는다.                                     짓는다 한다. 그 이치를 따진 것은 아니었으나 꽃처럼 예쁜 존재 ‘꽃님’이라고
        “쏴아 ~” 수돗물 줄기가 그치면 뒷통수가 따가워진다. 휙 뒤돌아 보면 발을 오    미리부터 부르는 성급함으로 태어나길 기다렸다. 솜털뭉치 같이 부들부들한
        종종 구르며 눈빛은 기대에 차 있다.                            강아지를 안았을 때의 푸근함과 따뜻함, 팔딱팔딱 뛰는 심장의 펌프소리가 아
                                                        직도 온기로 머물고 있다.
        먹기 좋게 자를 겨를도 없이 한 조각 툭 떼어 입에 넣어주면 “사각사각” 고개
        를 있는 힘껏 쳐들고 눈 깜박일 사이도 없이 정말 맛있게 먹는다. 이렇게 맛난     한 생명체를 책임진다는 것은 두렵다. 무식할 만치 책임감의 압박에서 벗어나
        음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까만 코는 반들반들 윤기 돌고      기 힘든 기질을 가진 나로선 묵직한 숙제였기에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그런데
        혀를 날름날름, 발은 타닥타닥 그 다음 사과 한 조각을 재촉한다.            아이들의 간절함에 이웃 언니네로부터 선물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랬는데 이젠 사과를 챙겨도 격하게 반겨주는 이가 없다. 햇볕 잘 드는 거실
        창가 쪽 폭신한 방석에 기대어 나른한 표정으로 햇살이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출산,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의 설레는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꽃님
        모습을 바라보던 풍경이 사라졌다.                              이는 벌써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기대와 환영 속에 이윽고 우리 집
                                                        에 온 꽃님이는 네 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내려놓을 겨를도 없이 품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 중에 “인간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서 소중한 아기 대접을 받았다. 그래선지 팔자 좋은 한량이 되었다. 언제나 유
        있단다. 하지만 너는 이것을 잊으면 안돼. 자기가 보살펴 주던 상대에게는 언      유자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늘어져 잠을 자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쬐그만
        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돼. 장미꽃과의 약속도….”    몸으로도 날아 뛰고 내리는 것은 얼마나 능수능란한지 소파도 침대도 발 뻗고
        가 있다.                                           눕는 곳 모두가 꽃님의 영토였다.
        왕자는 여우와의 익숙한 길들이기를 거부하며 자유로움을 선택했다. 뒤돌아
        서는 왕자에게 여우는 “네가 너의 장미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장       털갈이가 끝나도 원했던 실버 색상이 아니라고 툴툴대다 골드블랙이 더 희소
        미꽃을 위해서 너의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는 말을 하며 작별인사를 건        하다는 아이들 말에 홀랑 나의 속물근성도 드러냈던 꽃님이다. 작은 체격에
        넨다.                                             온순하며 활동성은 적은 무릎견이라 불리는 요크셔테리어. 대소변 잘 가리고
                                                        깔끔쟁이였던 그녀는 일과 학업으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
        과연 꽃님이는 우리와 보낸 시간이 행복했었나? 등에 손을 얹고 천천히 훑어       점 역할도 했다. 비싼 국제 전화를 해서도 먼저 묻는 것이 꽃님이 잘 지내냐는
        주면 두 눈을 껌뻑이며 지그시 눈을 감던 꽃님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안부가 먼저였을 정도였으니 듣는 사람이 서운할 지경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꽃님’이라 미리 작명부터 해 두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라 생각하여 가장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본떠 이름을        한가한 시간이 길게 주어지면 권태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이 녀석에게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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