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이영숙 개인전 2023. 9. 20 - 10. 1 아트뮤지엄 려
P. 5

‘무’는 아무것도 없기에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열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나 하찮은 삶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를 깨닫게 되지
            만 ‘무’의 세계에서 보면 새로운 ‘여기’일 수 있다.”(작업노트) “허무한 것, 그런 게 작업일 수도, 삶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무’인데, 그 ‘무’ 안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인 것 같다.”(작가와의 인터뷰) 이영숙은 반복이 회의감을 가져오고 허무를 느끼게 하지만, 그 허무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로 전환되어 새로운 것이 창조될 공간을 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임”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바로 작은 점(죽음)이 무한한 존
            재(삶)일 수 있는 가능성이며, 반복된 행위가 허무(죽음)를 불러오지만, 새로운 창조(삶)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무의미한 반복의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가 행복
            할 수 있는 것은 ‘반복’에 초점을 맞추던 것을 그 시선을 바꿔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허무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무’가 어떻게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작가는 ‘우연성’과 ‘여기(here)’의 개념을 ‘무’에 대입함으로써 ‘무’를 창조
            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도 변화가 있고,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반복은 조금씩 차이가 있고, 그것이 변화를 낳는다.
            내일도 반복될 것으로 생각했던 삶이 갑자기 내일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生)과 사(死)는 언제나 지척에 있다. “결국은 삶과 죽음을 늘 안고 걸어가는
            인간이다.”(작업노트) 하지만 ‘여기’ 있는 자는 내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직시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삶이다. 내일의 죽음을
            바라보며 사는 인간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삶의 ‘반복’을 견디며 살아갈까? 우연성(예측 불가능성)을 긍정하며 끊임없이 새로 생성되는 현재
            (‘여기’)를 살아가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이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연성과 ‘여기’가 ‘무’에 대입되어 창조의 공간이 되는 변화를 작업의 방식으로 끌어온다. 최근 작가는 물감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아크릴 푸어링
            (acrylic pouring) 기법으로 초벌 표현을 한 후 그 위에 그와 어울리는 색상의 점이나 작은 원을 반복적으로 그려 화면 가득 채우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쉽
            게 말하면 규정화된 형상을 그리는 것을 목적이나 목표로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물감의 ‘우연성’을 토대로 하여 순전히 현재, 바로 ‘여기’에만 집
            중하면서 그 우연성에 어울리는 점이나 작은 원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렇게 어떤 목적이나 목표 없이 ‘지금-여기’에서 행하는 행위를 즐기며 반복했을 때, 작
            품은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바꿔 말해서,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우연성을 따라,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반복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점이나 작은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새롭게 갱신되는 현재(‘여기’)를 묵묵히 살아갈 때, 작업이 도달하는 지점에 삶과 죽음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바로 이
            영숙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스며 있다. 작가는 ‘지금-여기’ 누리고 있는 삶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태도, 다시 말해 목적 없이(우
            연성) 삶 그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소요유(逍遙遊)’의 태도다.


            [ 소요유와 목적 없음의 목적 ]
            우리는 <Here-소요유(逍遙遊)>라는 작품 제목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작업 방식과 태도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알 수 있다. 작가는 ‘지금-여기’
            에서 현실 세계에 얽매이지 않은, 초월한 삶 그 자체를 살아가길 꿈꾼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소요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요유’는 장자의 책 첫 부분인
            내편(內篇)의 첫 번째 나오는 편명으로, 장자가 추구하는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소요(逍遙)’는 별다른 목적 없이 어슬렁거린다는 뜻이고, ‘유(遊)’는 이곳
            저곳을 노닌다는 뜻이다. 결국 ‘소요유’는 “여러 가지 제약에 얽매여 있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저 높은 절대 자유의 세계에서 마음껏 노니는 진인(眞人, 참인
            간)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작업노트). 현실 세계의 어떤 인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삶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요유는 매일 반복되
            는 삶이라도 그 삶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임을 일깨워 준다. 삶을 여행으로 비유했을 때, 과연 그 목적지가 따로 있겠는가. 삶 그 자체가 목적일 수밖에 없
            다.


            앞서 말했듯이, 시시포스가 큰 바위를 밀어 올려 산 정상에 놓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 그것은 형벌이다.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고, 목적은 의미를 상실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돌의 입자 하나하나, 산의 광물의 광채 하나하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와 함께 시시포스의 ‘고귀한 성실성’이 드러난다. 이영숙은 어떤 형상을 그리기보다 소요유의 태도로 현재의 순간(‘여기’) 그리는 점이나 작은
            원에 집중한다. 이것은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절대 자유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소요유’는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無不爲)’, 즉 ‘도는 항상 작위(作爲)함이 없지만,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과 그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 반복은 그 자체가 이미 성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목적 없는 반복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오히려 목적에 합치된다. 소요유의 태도로 그
            림을 그린 작가는 ‘무불위(無不爲)’하기 위해 ‘무위(無爲)’한다. 즉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목적(무불위)을 위해 목적을 없앤다(무위). 이것이 ‘절대 자유의 세계’
            의 원리다. 따라서 우연성을 따라 한 획 한 획 점을 찍고 원을 그리는 작가는 그리는 그 행위 자체로 절대 자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작가는 아직 완성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완성된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이영숙은 ‘이미’과 ‘아직’ 사이에서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3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