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김소영 개인전 2024. 6. 5 – 6. 10 갤러리라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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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을 맞고 자라는 섬 시금치는 누군가의 소중한 양식이 된다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일상을 보내며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곱 분의 선생님들을 만나 수업을 진행한 지도 일 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김소영 선생님은 이 헐거운 수업에서 꾸준히 자기 작업을 일구어나가시는 분이다. 수업을 맡아 처음 시작하던
날, 6.25 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은혜를 입었던 이웃들의 도움으로 풀려난 부친의 일화와 선생님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에 대해 들려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 나는 마음이 뜨거워졌었다. 취나물 꽃, 벌개미취
같은 들꽃의 이름을 알고, 또 가만히 들여다보아 아이들의 웃음을 떠올리는 선생님의 시선에는 꽃이 많이 피어있다던
할아버지의 정원이 담겨있고,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존중하여 대하셨다는 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선생님은 그림을 앞에 두고, 언제나 그것을 그리게 된 연유에 대해 찬찬히 들려주신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 작업의 마침표가
찍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소재들은 마치 한 편의 에세이처럼 어느새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의 그림 속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존재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멀리서 바라다보아야 눈에 담기는
넓은 대지에서부터 쪼그리고 앉아야 보이는 작은 이끼까지, 우리 주변에서 말없이 찾아지는 자연의 조각들이다. 보는 이
없어도 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자라나며 계곡 옆을 밝히는 애기똥풀, 겨우내 눈을 견뎌내고 열매를 맺는 매화처럼 시종일관
그녀의 관심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를 피워내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인 동시에, 분투하며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름답다. 언덕을 가득 채운 봄날의 산수유는 마치 불이 일렁이듯 스스로 빛을 내고, 그 연약하다는 억새들은
함께 바람에 흔들리며 단단히 서 있다. 이것은 신비이다. 친구들과 함께 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푸른 오름 속에서 녹록하지
않았던 지난 고난들이 맺어낸 유산을 본다. 태고의 숨결을 품은 듯 미지의 물결이 일렁이는 그 시절을 거쳐온 나와 너는 우리가
되어 지금 함께 서 있다. 바람에 휘청이는 우리네 존재에 대한 인정은 또 다른 누군가의 약함을 애정으로 바라보아 곁을
내어줄 마음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기꺼이 내 이웃의 주변이 되는 것.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몸소 보이는 자리가 아닌가?
너무도 당연히 매일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며, 해풍을 맞고 자라는 차밭과 섬 시금치는 누군가의
소중한 양식이 된다. 스윽스윽 잔잔한 붓질을 주저함 없이 쌓아 그녀가 만들어 나가는 유려한 화면은 우리에게 어떠한 터전이
필요한가에 대한 혜안이다.
무언가에 꾸준하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열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과 제도에 대해 표현하고
싶으나 너무 큰 감정의 소요를 만들 것 같아 피하였다는 선생님은 되려 이야기꾼이 되기를 자처하신다. 자기의 방식을 따라
편안하게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도 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열렬함을 본다.
- 이연경(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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