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이은자 초대전 2022. 12. 14 – 12. 27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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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그림 한 장이 운명이더라
70년대 여대생이 칠순에 되돌아보니, 말 한 마디와 그림 한 장이 운명이 된 것 같다.
6ㆍ25를 겪은 50년대 중후반,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밥 한 그릇은 바로 생명 자체였고 희망
이었다. 5, 6세쯤 아침에 눈을 뜨면 목발을 짚거나 타지에서 온 장사하신 분들이 줄지어 대문 안으
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듬뿍 담아주신 밥과 반찬들을 쟁반에 담아 마루 끝으로 종종걸음 쳤던 일은 일과였었
다. 어느 날 늘 오셨던 할머니가 마루에 걸터앉아 손금을 봐준다며 고사리손을 들여다보고 선생을
하겠다고 하셨다. 그날 이후 선생을 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사범대학 합격 때까지 공부만 하며,
지금까지도 평생 교직 이외의 길은 생각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신앙에 대한 갈등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을 멈추고 뒤척거리고 있었는데, 여섯 살짜리 작은아이
바오로가 옆에 엎드려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십자가가 유난히 큰 교회를 먼저 그
렸었다. 그리고는 노란 병아리가 두 다리를 쩍 벌려 성경책을 입에 물고 황급히 교회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토끼, 개구리, 강아지, 나비, 제비, 꽃게, 개미 두 마리까지도 저마다 까만
성경책을 입에 물고 몹시 서둘러대며 교회로 달려가고, 뛰어가고, 날아가고, 기어가는 그림이었다.
하느님의 기운이 온 천지에 뻗치어 옴을 느낄 수 있는 그림 한 장을 보며, '동물과 곤충들, 개미
까지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증거 하기 위해 저렇게 서둘러대는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가' 바오로의 그림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사로잡았다.
당시 '바오로의 그림'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신앙체험기 표지화로
해서 천 권의 책을 성전 건립 후원금으로 내놓기도 했었다. 문학의 시작이 바로 아들이 그린 그림
이었고, 이제야 캔버스에 표현할 생각도 해본다.
37년 전, 세례를 받고 초등학생 교리교사를 하면서 신앙의 열병을 바가지에 성화를 그려가며 가
라앉히곤 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3년 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바가지에 그려봤던 성경 이
야기들을 그려갔다. 아이들 그림이냐, 왼손으로 그렸느냐는 질문을 받아가면서도 교회의 분위기
를 캔버스에 표현하고 싶어서 서툰 붓질을 이어온 것이다. 뜻밖에 초대전으로 세상 구경을 하게
돼서 부끄러우면서도 뜻깊고 고맙다.
-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