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이 시대의 작가전-요산요수의 백인현 2025. 9. 4 – 9. 14 아트센터 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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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역사의 도시’ 또는 ‘교육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借景)의 의미를 더한다. 차경은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높이는데 효과가 있다. 민예품의 이런 기능에 착안한 이
더해 최근에는 ‘문화의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인구 소멸 뜻이다. 한옥에서 창을 창으로 보지 않고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교육방법은 전통미술교육의 확장에 활용할 가치가 있으며 더욱
지역에 속하는 작은 도시지만 문화와 예술 분야의 수준은 백인현의 작품세계는 크게 200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액자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와 확장할 필요가 있다.
어지간한 큰 도시 못지않다. 그중에서 미술 분야만 보더라도 타 수 있다. 그는 공주사대 미술교육과 2회 졸업생으로 1975 종병의 와유산수(臥遊山水)의 맥락과도 통한다.
도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높다. 사립미술관도 있고 학번이다. 대학 재학 때부터 졸업 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지역미술 활동
국제 비엔날레도 있으며 갤러리도 많다. 물론 작가도 많다. 작품을 보면 마곡사 갑사 등 인근 사찰을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미술교육
특히 기와를 묘사한 묘법이 눈에 띈다. 수묵담채의 담백한 지역미술사를 기술할 때 일반적으로 지역 출신으로 서울에 가서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요소는 공주대학교 표현이지만 묵향이 가득하면서 문기 넘치는 그림들이었다. 우리 미술교육이 서양미술 위주의 치우친 경향이 있음은 시대의 성공한 작가를 우대한다. 지역 출신의 자랑스러운 예술가로서
사범대학과 공주교육대학교에 미술교육과가 있는 것이다.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전통미술교육을 기록한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바뀌고 있다. 옛날에는 지역
공주는 대한민국 미술교육의 요람이며 중심이다. 한국 초, 중등 그러다 1990년대에는 담채가 풍부해지면서 화면에 기운생동의 버릴 수는 없다. 백인현은 우리의 전통미술인 한국화를 전공하고 기반으로 예술 활동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면
미술교육은 공주에서부터 출발하여 전국 방방곡곡 학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였고 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그는 대학 작가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어떻게 하면 전통이 현대와 지금은 활동 기회도 많아지고 또한 오히려 더 의미 있고 가치
현장에서 꽃피우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지역미술사에서 공주의 때부터 사진반과 산악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산수화의 경지는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함께 호흡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있는 일로 평가되고 있다. 그야말로 지역을 지키며 지역의
미술사적 가치는 미술교육 측면을 중요하게 기술해야 한다. 이런 자연에서의 활동과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한국화민예품>이다.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한 지역기반 작가들이 우대받아야
90년대의 그림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반응하는 역동적 움직임이 백인현은 한국화를 민예품에 접목한 교육방법을 개발하였다. 한다는 것이다.
백인현은 공주사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공주교대 미술교육과 감지되며 과감한 생략과 조형적 정형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화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미술교육의 2004년부터 시작하여 20여 년을 이어온 한국화민예품전은 백인현은 공주교육대학교에 재직하였기 때문에 지역에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따라서 백인현에 대한 논의는 2000년대에 들어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지금의 요산요수 전통미술교육에 방향성을 제시한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여러 기회를 통해 발전적 역할을 해왔다.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미술교육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산수의 틀이 잡힌 것이다. 오방색을 기조로 화려한 색채가 전국의 한국화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작품전으로서의 특히 그가 20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 진행해 온 <한국화민예품전
지역사회에서의 활동 등을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본 고에서는 구사되면서 현대의 시대에 맞는 현실감각을 나타냈으며 묘사를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술교육적 측면이다. 현대의 >은 공주를 넘어 전국적인 미술 행사로 공주의 위상을 높여 준
작가의 작품세계와 미술교육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지역사회 생략하고 활달한 선으로 단순하게 요약한 조형 어법이 우리 미술교육은 서양미술교육에 집중되어 전통미술교육은 활동이다. 또한 공주미술협회와 충남한국화협회, 한길한국화회
활동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형성되었다. 한국화의 현대화에 크게 한 발 떼어 놓은 시기라 할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지경이다. 이에 방법적인 구체성을 등 지역에서 미술단체들을 만들어서 회장 등 중추적인 역할을
것이다. 가지고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교사 연수 등을 통해 학교 현장에 하였다. 이를 통해 공주가 <문화의 도시> 또는 <미술의 도시>로
작품세계 파급되도록 한 것은 하나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가는 길에 초석을 까는 일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은 기억해야
이때 전통의 틀을 과감하게 깬 획기적인 방법적 실험을 하였는데 할 사항이다.
백인현 작품의 큰 명제는 요산요수(樂山樂水)다. “어진 자는 전통 가옥의 격자창을 액자 대신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국화의 이 전시의 시작은 1995년 그가 충남한국화회 회장으로서 그해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디스플레이를 위한 액자 제작 방법은 표구해서 유리 액자를 있었던 ‘미술의 해’ 기념으로 한국 부채 그림 전을 기획했던 백인현은 전통과 현대, 순수회화와 공예, 미술과 교육 등 서로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끼우거나 족자 또는 병풍을 갖추는 것이었다. 백인현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한국화가 전통에 갇혀있지 않고 현대와 이질적인 요소들을 절충하고 조화롭게 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는 말, 즉 <智者樂水 仁者樂山>에서 전통적인 방법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실제 한옥에서 나오는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마다하지 않고 하였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의 위치에서
기원한다. 작품에 사의를 담고 있는 전통적 회화관이다. 격자창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민예품과 연결을 시도 하였다. 부채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등, 연, 역할을 해온 작가이자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공주문화관광
우산으로 범위를 넓혔다. 합죽선과 접는 부채, 둥근 부채, 특별한 재단의 <공주 이 시대의 작가전>으로 지역 미술사의 한
그의 아호 송계(松溪)는 고향 송계동(松溪洞)에서 따왔다. 예부터 건물에 채광을 위해서 서양에서는 스테인드글래스를 용도의 별선, 한지 사각 등, 둥근 등, 한지 방패연, 가오리연, 한지 페이지에 기억되게 됨은 다행스런 일이다.
송계동은 지금의 세종시 첫마을로 금강 변에 자리 잡은 아늑한 만들었지만 한옥에서는 한지로 바른 격자창을 만들어 썼다. 우산, 한지 옷, 한지 그릇, 한지 포장지, 병풍, 가리개, 한지
마을이었다. 그는 2014년 공주문화원 초대전 도록에서 격자창은 유리창이 나오기 전까지 동서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격자창과 미닫이창 등 한지를 전통 민예품과 접목시켰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마을 뒷산엔 큰 소나무가 많았고 그 산에서 아름다운 채광창이었을 것이다. 이런 창살문은 여러 의미에서
흐르는 시냇물은 대평리 벌판을 돌아 금강으로 흘렀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한지를 바른 격자창은 이 방법을 전시에 국한하지 않고 교사연수 등을 통해 전국의
송계동이라 불렀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계룡산 자락에 있는 방 안과 밖을 완벽한 단절이 아닌 소통의 여지를 준다. 따라서 미술교육 현장에 보급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교육에서
작업실의 옥호도 <송계산방>이다. 그런 만큼 유년기의 기억이 백인현의 격자창 표구 그림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 즉 차경( 재미와 실용의 기능은 교육에 참여 의욕을 높이고 교육적 효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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