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김민배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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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 金榮澤 펜화가










              한국 최고의 펜화가 늘봄선생 펜화작품을 나는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                        게 됐다. 늘봄 선생은 내가 자리를 옮겨갈 때마다 자신의 펜화 판화본을

              의 찐 팬인 셈이다. 늘봄선생은 2002년까지 중앙일보 주말판에 국내 국                     제작원가만 받고 제공해, 주변의 知人들에게 적절하게 인사를 할 수 있
              보급 문화재 펜화를 연재해 왔으며, 인기를 구가했다. 남대문을 비롯, 통                     도록 배려해 주기도 했다.
              도사, 미황사 대웅전, 경복궁 해태상 등 각종 석물이 0.05mm 섬세한
              펜터치 20만~50만 회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대장암>진단을 받고, 내 방에 찾아왔을 때 사찰 같은 고

                                                                           즈넉한 곳에 거처를 마련토록 간청하자 늘봄선생은 海南 미황사 주지스
              나는 2003년 1월, 주간조선 편집장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늘봄선생을                       님인 금강스님께 연락해 미황사에 둥지를 틀고 투병생활을 했다.
              수소문했다. “주간조선에 늘봄선생 펜화 연재를 하고 싶다. 펜화도 직접
              그려 소개하고, 매주 2~3페이지씩 기사도 직접 써달라, 가급적 연중기                      2019년 8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미황사 山寺에서 열린 펜화전은

              획으로 하고 싶다.”                                                  그렇게 열리게 됐고, 공전의 히트를 쳐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됐다. 2018
                                                                           년 日本東京 주일한국 문화원에서의 <김영택펜화전시회>도 서로 힘을
              늘봄선생은 나의 이런 제안을 즉석에서 수락했고, 약속대로 매주 그의                        보태 만든 기획전이며, 이 전시회 또한 대박이 났다.
              가늘디가는 필치로 재현된 국내 각종 문화재 펜화가 그의 해설과 함께

              주간조선을 장식했다. 늘봄선생의 펜화는 주간조선 인기상품이었다. 독                        2021년 1월 13일 늘봄선생이 生을 달리할 때까지 나와 그는 나이차에도
              자들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폭발적인 독자 반응에 힘입                       불구하고 친구 같은 <아름다운 同行>을 했고, 나에게는 소중한 인연이
              어 1년에 몇 차례 <김영택 펜화도록>을 주간조선 부록으로 내보냈고,                       기도 하다.
              이 또한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는 2020년 어느날 찾아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은혜를 입은 금
              당시 발행부수 4위이던 주간조선이 3~4개월 만에 1위로 치고 올라간                       강스님과 김민배대표에게 마음의 보답은 하고 싶다”며 제작 원가로 그
              데에는 김영택 펜화 연재도 크게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맺어진                        의 펜화판화본 100점을 잊을 수 없는 선물로 남기고 갔고, 남은 소장본
              늘봄선생과의 인연은 2004년 내가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옮기고, 또                       은 그 일환이다.

              2013년 2월 조선일보를 떠나 TV조선 보도본부장으로 이동해 3 연임
              TV조선 대표이사를 마치고 올초 퇴임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늘 만날 때마다 “나의 前生은 중(스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우리
                                                                           나라 사찰등 불교문화재 보존과 복원에 크게 기여해 왔다. 오늘따라 그
              주간조선 연재 이후 전국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늘봄선생은 거의 매                        의 해맑은 밝은 미소가 그리워진다.

              년 서울을 비롯, 전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고, 그의 아티스트로서의 聲
              價도 계속 솟구쳤다. 주간조선 연재당시 150만원 하던 그의 작품은 300
              만원→700만원→1000만원→1500만원→2000만원→3000만원으로 계
              속 뜀박질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 시절 당시 경주 <獨樂堂> 정자 그림

              원화를 늘봄선생의 특별한 배려로 시중가의 절반인 300만원에 소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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