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오세열 초대전 8. 30 – 9. 26 나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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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린아이들이 쓰는 것처럼 삐뚤빼뚤하게, 단순하게…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숫자와 떨어질 수 없어요.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늘 숫자에 얽매여 때로는 그 숫자에 예민해 하고, 때로는 많
            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기도 하고요. 숫자는 희로애락 그 자체에요. 감상자들은 그림 속 숫자를 통해서 자기만의 기억과 내재된 자아와 만날 수가 있
            는 거죠. 또 우리 어릴 적에 학교에 처음 들어가 제일 먼저 하는 게 바로 숫자 배우는 건데. 몽당연필에 침을 살살 묻혀가며 숫자를 쓰던 그때의 천진난만한 시절
            이 자꾸 그리워집디다. 이게 나이를 먹어서 이제 노인이 됐다는 뜻 아닌가 싶어요. 또한, 숫자를 100호나 200호 같이 큰 캔버스 전면에 꽉 차게 써 내려갈 때는
            초반엔 괜찮지만 이후부터는 아주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이러한 반복된 행위가 제게 인내심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마치 산속에 들어가서 도 닦는 것처럼, 저는
            숫자를 통해 제 마음을 다스리는 경험을 자주 해요. 캔버스 맨 밑까지 숫자를 다 써내는 순간, ‘해냈다! 끝냈다! 외치죠. 저는 숫자와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제 이
            름도 숫자로 이뤄져 있거든요. 오(5), 세(3), 열(10). 다 합치면 열여덟. 하하.” - 오세열/아트조선/2022 인터뷰어 중에서 -

            오세열선생은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궁금해하는 관람자들에게 말한다.


            “제 작품의 제작 과정의 비밀은 물감이 바르기 이전에 기초 작업이 있는데 이 단계가 작업 전체 중요도의 80%를 차지해요. 아주 핵심적인 단계인 거죠. 이 기초
            작업에서는 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있어요. 제가 제 작품을 봤을 때 어떤 중요한 맛, 깊이와 밀도가 있는 느낌들은 바로 그 기초 작업에서 오는 영향이 커
            요. 그러고 난 뒤 색을 올리고 그 표면을 바늘이라든지, 나무젓가락을 삐죽하게 깎아서 긁어내는 거죠. 송곳도 곧잘 사용하고요. 그러나 붓은 절대 쓰지 않아요.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선 몇 가지 색을 혼합해야 하는데 붓을 쓰면 그 도중에 색이 이미 죽어버리거든요. 신선한 맛이 사라지는 거예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무
            작위로 그려낸다는 것입니다. 선을 그릴 때, 이렇게 이런 식으로 그려야겠다 다짐하고 그리는 것이 아닌, 나도 모르는 행위에 의해서 나오는 무작위 말예요. 전
            그렇게 작업합니다. 자연스러움과 본능적인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요. 또한 두꺼운 물감층을 긁어냄으로써 캔버스의 숨통을 트여주거나 상처 내는 느낌도 나고
            요. 상처를 내면 아픔이 따르잖아요. 마치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캔버스는 내 몸이기도 하니까. 실제로 작품할 때, 어떤 그림은 쉽게 나오
            고 어떤 그림은 오랫동안 붙들고 있어도 마음에 썩 들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나 결국은 그래도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으면서 나온 그 그림에 더 애정이 가더
            군요.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뭐든 너무 쉽게 나오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위 인터뷰어 -

            이처럼 오세열선생은 자신만의 특별한 캔버스 위에 색을 여러번 두껍게 올린 다음 이를 면도날이나 이쑤시개, 못 따위로 긁어내는 기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
            현해 낸다. 그리고 그 위에 오브제를 붙여 꼴라주를 완성한다.
            꽃을 오려 붙이고 딸기를 오려 붙이기도 한다. 그 딸기 위에 요즘의 식당 계산대에서 볼 수 있는 현대판 가느다란 이쑤시개를 붙였다. 마치 2020년대의 한국인
            들은 이렇게 이쑤시개로 딸기를 찍어 먹었음을 수십 수백년이 지난 후의 후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할 모양이다.
            어디에서인지 약숫가락은 주워 온 모양이다. 이 약 숫가락을 뒤집어 붙이고 그 위 쪽에 줄기를 그리고 각양각색의 단추로 꽃을 붙여 예쁜 화분을 완성했다.
            최근에는 초코파이를 오려 붙인 작품을 몇 점 완성했다. 초코파이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든 좋아했던 간식거리였다. 특히 군대 얘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이야기 거리이다.
            어떤 작품에는 조그만 배달용 간장이 붙다. 그 통안에 간장이 조금 남아 있다. 그대로 아크릴릭 액자를 해 버렸는데 100년후 그 통안의 간장은 어찌되어 있을
            까?
            최근 모 아트페어에서는 커다랗고 새파란 포카리스웨트 캔이 붙은 오세열선생의 100호정도 되어 보이는 작품을 보았다. 지금도 그 강렬한 파란 색깔과 숫자들
            이 눈에 선하다. 이러한 오세열선생의 작품들은 현대를 대변해 주는 진정한 대중미술이고 팝아트가 아닌가 싶다.

            실제로 오세열선생의 화실에 가 보면 한켠에 이러한 오브제를 모아둔 무더기를 볼 수 있다. 단추를 포함하여 여러 형태의 재활용품을 모아놓고 작품의 필요에
            따라 적당한 소재를 골라 쓴다. 우리가 무심히 버리는 쓰레기이겠지만 오세열선생의 손에 들어가면 작품이 된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시간이 지나 미래가 된다.

            1.2.3.4.5.6.7.8.9.10.1.2.3.4.5.6.7.8.9.10.1.2.3.4.5.6.7.......아주 큰 무한대의 화폭에 오세열선생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숫자와 인물, 기호와 정물 그리고 꼴라주가
            아우르는 작품 활동이 영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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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주 열 (미술사학박사 / 나마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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