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정회윤 초대전 5. 7 – 5. 16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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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시간의 입자
이 글을 쓰면서 인연을 떠올립니다. 정회윤 작가와 같은 학교에 근무한 인연으로 작가의 초대를 받아 개인
전에 가게 되었습니다. 팬데믹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시기여서 조심스럽게 전시관 문을 연 기억이 납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시회에서 맞닥뜨
린 작품들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가 체감될 만큼 낯설었지만, 오히려 낯
설어서 강렬한 예술적 쾌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드러내서 수용자의 내면에 새
로운 파동을 일으키는 것. 오래된 예술 이론이 전시회를 관람하는 내내 마음 깊이 체화되었습니다.
정회윤 작가의 「버드나무2」는 옻칠 회화라는 장르가 어디에 와 있고 어떤 가능성을 열고 있는지 노정하는
작품입니다. 할머니의 구들방 한구석을 차지하던 자개장에서나 보고 감촉했던 옻칠과 자개가 공예가 아닌
회화의 옷을 입고 시간의 굴레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순간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포착할 수 있습니다. 거무
죽죽한 옻칠의 흑백 세계가 화사한 파스텔톤의 컬러 세계로 재탄생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재질의 자개는
치렁치렁하면서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잎사귀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작가는 소재와 기법의 시간성에서 벗어
나 새로운 시간을 부여함으로써 현대적이고 세련된 형식미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성의 탈
피를 통해 작가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버드나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딱 봐도 오래된 버드나무의 시간,
그 오랜 시간에서 비롯된 장대한 서사가 이 작품에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작은 탄식이 일
어납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버드나무의 현재를 그리기 위해 옻칠과 자개라는 오랜 소재와 기법을 현대화
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든 것입니다. 버드나무의 잎과 수피를 표현하는 얇은 조각의 자개는 무수한 시간의
입자로 반짝입니다.
새로 발표하는 정회윤 작가의 ‘한강’ 시리즈에서 여전히 버드나무를 만날 수 있는 게 반갑습니다. 강가의 버
드나무가 밝고 어두운 갖가지 색감으로 다채롭게 표현돼서 하나의 타이틀로 묶이지 않는 개별성을 획득하
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한강#3」입니다. 한강의 한가운데 우뚝 선 듯한 버드나무의 주위로 물
방울 같은 자개가 영롱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볼수록 둥글게 박혀 있는 자개는 물방울이
아니라 빛의 입자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버틴 버드나무의 서사를 헌사하는 듯한 알록달록한 자개가 빛의
입자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자개에 이토록 다양한 빛깔을 선사할 수 있는 작가에게 빛의 입
자야말로 무한한 색깔의 영역 아닐까요. 정회윤 작가는 빛으로 시간을 자아내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빛과 시간 속에 있습니다. 옻칠하고 나서 옻칠이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한 조각의 자개에 어울리는
색을 입히는 그녀의 작업은 영롱하게 빛나는 시간성을 갖습니다.
정회윤 작가의 개인전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아직 소설가가 아닌 시절이었습니다. 작가는 제가 소설가가 되
면 소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고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말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2025년에 등
단하게 되어 이 소개 글을 기쁜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정회윤 작가의 작품은 제게 영감을 주어 제 단편소
설 한 편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정회윤 작가의 빛과 시간의 예술이 또 다른 영감과 공감을 낳으리
라고 확신합니다. 인연은 신비롭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다음번의 소개 글을 기대하면서 정회윤 작가의
작품이 당신의 마음에 가 닿기를 고대합니다.
- 소설가 홍 성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