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정회윤 초대전 5. 7 – 5. 16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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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예술이라 불리는 옻칠의 과정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험이자, 자연에 대한 경외
심을 담는 여정입니다. 작품에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인
간과 자연이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물결, 빛, 바람, 촉각, 소리, 향, 여행, 삶—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서사를 통해 참나를 찾
아가는 과정을 표현했으며, 특히 한강의 자연 풍광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등장하는 다양한
모티브들은 물의 순환, 생성과 소멸, 밤과 낮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주요 기법으로는 목태칠기를 활용하였습니다. 목태칠기는 고려 시대부터 불교용품과 같은
귀중한 공예품 등에 쓰인 방식으로, 나무로 만든 기물에 풀과 옻칠을 섞은 삼베천을 발라 뒤
틀림을 방지하고 그 위에 옻칠과 섞은 토분 반죽을 여러 겹 쌓아 올려 견고한 표면을 만듭니
다. 이후, 자개를 붙이고 다양한 색층의 옻칠을 겹겹이 칠해 올린 뒤, 사포로 갈아내어 색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인 얼룩과 비정형의 흔적
은 마치 상처 혹은 나이테와도 같은 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기며, 사포질이 곧 하나의 회화적
행위가 됩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매끄러운 질감으로 정제되는 옻칠을 분청사기의 담대함과 우연적 효과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표면은, 마치 점토를 주걱으로 쓸어낸 듯한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기며 에너지의 깊이를 담아냅니다. 매끄러움과 거침, 정제됨과 우연성
이 공존하는 이 과정은 고요함 속의 생동감을 구현하며, 옻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인간의 손길이 담긴 예술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오
래전 박물관에서 마주한 옻칠 공예품이 천 년 전 장인의 온기를 전해주었듯, 제 작업 또한 누
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