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김이훈 초대전 2025. 5. 21 – 5. 30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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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나를 부르러 오는 소리
바람의 풍경(2011). 잃어버린 하늘(2015). 노아의 바다_하늘길을 걷다(2018). 세 개의 시간이 흐르는 반송리 아침
(2019). 하늘의 노래(2020). 바람에 서다(2021).
그동안 작가가 전시에 붙인 주제들이다. 그전에도 전시가 있었지만, 작가가 비교적 일관된 주제 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추려본 것이다. 순차적인 그리고 별개의 경우로서보다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간혹 타이틀이 다른 전시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그런 만큼 평소 작가의 창
작에 대한 이유와 인문학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주제들이다. 흔히 추상미술에서 보듯 주제와 그림이 별반 상관
이 없는 때도 있지만, 작가의 그림(혹은 그림에 대한 태도)에서처럼 의미가 강하고 메시지가 강한 경우에 주제는
그림의 성격을 함축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주제 분석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가 있을 것
이다.
먼저, 작가의 그림에는 바람이 분다(바람의 풍경. 바람에 서다). 그림 속에 부는 바람은 세풍에 해당하고, 세파에
해당한다. 그동안 작가가 살아오면서 맞섰을 거센 바람을 상징하고, 드센 파도를 상징한다. 그 바람 앞에 작가가
홀로 서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아래 내가 제일 귀하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하늘 아래 오직 나
밖에 없다는 외로움과 존재론적 고독을 표현한 말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세상에 던져진다고 했다(세계 내 존재). 그래서 존재는 태생적으로 고독하다. 그렇게 나는 저 홀로 바람에
맞서면서 서 있다. 여기에는 예술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의가 느껴지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예술가(혹은 예술가 신화)의 결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세상에 맞서는 작가의 태도에도, 작가의 분신인 그림 속에
도 바람이 분다.
그리고 하늘이 있다(잃어버린 하늘. 노아의 바다_하늘길을 걷다. 하늘의 노래). 작가는 하늘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잃어버린 하늘을 상상으로 그린다. 무슨 말인가. 신께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시고, 궁창 아
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7)는 창세 신화에서 보듯 노아의 홍수 이전에 하늘은
지상의 물 그러므로 바다와는 또 다른 물이었다. 각각 하늘 물과 바닷물이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그렇게 일체
를 이룬 풍경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궁창의 창이 열리면서 갇혀있던 물이 쏟아져 내려 지상에 홍수가 났고,
이로써 세상이 한 차례 격변을 맞게 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지금의 하늘은 어쩌면 물이 빠져나간
빈 하늘인 셈이다. 다시, 그러므로 지금의 빈 하늘은 원래 물로 가득했을 하늘,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의 하늘, 원형
적 하늘을 반영하고 있고, 작가는 그 잃어버린 하늘이며 원형적인 하늘을 되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잃어버린 하늘을 되불러올 것인가. 그리고 상실된 하늘을 다시금 소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신화와 문명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론적 기억
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하늘은 어쩌면 이런 반복 상징이고 원형일 수 있다. 지금의 하늘이 유래했고,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자신마저 유래했을 존재론적 원형일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존재론적 원형을, 그 원형적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어떻게 그 일은 가능한가. 작가가 그린 하늘이 어떻게 다름 아닌 원형적 하늘이고 풍
경임을 알 수가 있는가.
플라톤은 상기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본다. 감각적 실재 자체는 의미가 없지만, 감각적 실재가 관념적 실재를 상기
시킬 때 감각적 실재는 의미가 있고 예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관념적 실재를 상기시키지 못하
는 예술은 단순한 모방의 차원으로 전락 되고 말며, 그런 만큼 그 존재 이유가 없다. 앞서 지금의 하늘은 하늘의 하
늘을, 원형적 하늘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지금의 하늘을 매개로 그때의 하늘을 상기시키고,
현실의 하늘을 통해 관념적 하늘을 본다(그리고 보여준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
에는 사실은 지금의 하늘과 그때의 하늘이, 현실의 하늘과 관념적 하늘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돼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하늘을 통해 자기가 유래하고 존재가 유래했을 원형적 장소, 그러므로 어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