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 김이훈 초대전 2025. 5. 21 – 5. 30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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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존재의 덧없음과 고귀함으로의 초대 19 117x80cm
Watercolor on canvas, Acrylic Supplements 2024
면 우주적 자궁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하늘은 태초의 물(생명의 원소? 영적인 기운? 원초적 에너지?)을 머금은 관념적인(그러
므로 어쩌면 이상적인) 공간인 만큼 그 외양이 강이나 바다와도 다르지 않다. 작가가 보기에 강도 물이고 바다도
물이고 하늘도 물이고 존재가 물이다. 거저 물이라기보다는 모든 존재가 영적인 기운에 감싸여 있고, 원초적인 에
너지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고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창밖으로 무심히 늘 보던 장면이 무한한 우주 에너지의 결과물로 보이기 시작했고, 붓으로 다시 그 에너지를
모아 놓는 작업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무심한 장면 특히 하늘이 그런데, 감각적 하늘을 통
해 어느 날 문득 그 이면의 관념적 하늘이, 우주적 에너지가, 영적 기운이 겹쳐 보였다는 증언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에너지는 항상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작가는 하늘을 매개로, 풍경을 매개로, 사실은 존
재를 감싸고 우주를 감싸며 흐르는 에너지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에너지
가 파문을 그리고 파장을 일으키고 파동을 불러온다.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빛살과 물결이 그렇다. 강이나 바다
에 물결이 일 듯 하늘에도 물결이 있는데 빛살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는 온통 이런 빛살과 물결로, 우주적 에너
지 그러므로 영적 기운이 그리는 파장과 파문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림 속에서 빛살과 물결이 서로 희롱하면서
하나가 되고, 하늘과 바다가 경계를 허물고 해체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그리고 바다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다. 에너지가 움직이면서 길을 내는 것인데, 길은 일정한 방향을 따
라 흐르기도 하고, 블랙홀이나 화이트홀처럼 휘돌면서 어딘가로(존재의 원천? 우주적 자궁?) 빨려 들어가기도 하
고, 그저 종잡을 수 없는 가변적이고 비정형적인 길을 내기도 한다. 작가는 그 하늘길을 원래 아침에 지저귀는 참
새 소리에 착상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길에서는 리듬이 운율이 느껴지는데, 실제로도 작가는 이 일
련의 그림들을 <하늘의 노래>라고 부른다. 존재를 감싸고 우주를 감싸며 흐르는 에너지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가
부르는 노래로, 궁극적인 존재가 존재에 분유하는 선한 기운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자연에 교감하는 작은 감
동이 우주적 기운에 공명하는 것으로 그 차원이며 경지가 확장되고 심화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저 자연 친화
적인 태도를 넘어, 그 자체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절에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영성주의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어
서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그렇게 작가에게 하늘은, 풍경은, 존재는 이중적이다. 감각적 실재이면서 동시에 관념적 실재이기도 한 것. 그 두
실재가 상호 간섭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내포하고 내포되면서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시간도 그리고 공간도 이중적(그리고 다중적)이다. 예컨대 <세 개의 시간이 흐르는 반송리 아침
>에서 보면 저기 멀리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나를 깨우러 오는 하늘(원형적 하늘)의 시간(그러므로 각성의 시간)
이 있고, 칠흑 같은 밤에 잠든 세상의 시간(세속적인 그러므로 욕망의 시간)이 있고, 새벽과 밤사이에서 미처 깨어
나지 못한 미몽의 시간이 있다. 작가가 보는 하늘엔, 풍경엔, 그리고 존재엔 언제나 이처럼 각성의 시간과 욕망의
시간 그리고 미몽의 시간(그러므로 어쩌면 가능성의 시간)이 하나로 흐른다. 그렇게 작가는 각성의 시간과 욕망의
시간 사이, 그러므로 어쩌면 신의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 사이에, 미처 잠을 덜 깬 미몽의 시간, 가능성의 시간 위에
서게 만든다.
작가는 흐르는 것은 흐르지 않는 것들의 명제라고 했다. 플라톤으로 치자면 감각적 실재는 관념적 실재의 모상이
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서정적인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한 작가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흐르는 것이 흐
르지 않는 것을 반영하고,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을 반영한다. 그렇게 자연풍경 속에 숨은 신의 손길로 이끌
고, 그 숨결을 호흡하게 만든다.
- 고 충 환(Kho Chunghwan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