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장범순 개인전 2023. 10. 11 - 10. 16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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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tura)’는 제거되고, 대신 간략하게 약호화되고 정보단위로 기호화된 소재들의 조합을 통한 화면으로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런
개념적 화면 구축방식은 화면과 관객과의 ‘소외효과(疏外效果)’, 즉 거리두기를 통해 감성보다는 판단과 해석이라는 인식적 접근방식으
로 소통의 구체성을 꾀하는 방편이다.
그렇게 장범순의 캔버스에 남겨진 내용은 권력과 자본의 불균형성에 의한 ‘갑’의 ‘을들’에 대한 지배와 차별과 배제와 폭력의 부조리한 현
상, 공정하지 않은 게임의 규칙, 약자인 오징어의 한계상황 등이다. 「오징어 게임」 영화에서의 무거움·허무한 유머·우리 시대 모든 ‘을들’
이 처해있는 전도된 현실처럼 장범순의 화면도 그런 불공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 시대 여러 모순을 풍유적으로 드
러냈다. 다만 장범순은 영화에 등장한 여러 소재나 장면을 직접적으로 빌려오거나 자연주의적 서술 방식으로 옮겨오지는 않는다. 영화
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의상이나 소품 등 원색의 키치적 조형요소들을 참조하면서도, 카툰(Cartoon)처럼 약호화된 상황 연출의 아이러
니,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의 평면적 캐릭터화와 익명성을 통해서 원작 영화보다 좀 더 일반화된 해석조건을 배치했다.
그것은 원작의 서스펜스가 가득했던 폭력 서사를 가벼운 팝적인 시각성으로 부드럽게 전환한 것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잔혹
한 장면을 만화나 전자오락 캐릭터처럼 중성적으로 캐릭터화해서 기호화한 것. 비유컨대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 공포를 유발하는 ‘오컬
트’를 ‘잔혹 동화’ 정도로 공포 수위를 낮추어 연출한 경우와 같다. 이는 관객이 긴장감에서 벗어난 편한 상태에서 좀 더 쉽게 내용을 수렴
할 수 있도록 인식적 통로를 넓히는 것이다. 이럴 때 주제는 감각적으로 모호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내용을 해석하는 인식적 방식으로 인
해 좀 더 분명하게 소통된다.
물리적인 폭력 장면을 등장시키지 않고도 원작의 내용이 온전히 읽히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장범순의 부드러운 성품과 反폭력적이고
反그로데스크적 심리나 체질로 인해서일 것이다. 혹은 작품 소구의 메커니즘, 즉 소비자의 공감 과정에 대한 의도적 친절과 배려(혹은 소
통전략)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이런 지점은 대체로 작가의 주관성이나 표현성을 강조하는 회화작가들과는 그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작품들은 「오징어 게임」 내러티브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시각성은 거기에서 독립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좋은 시도였다고 여
겨진다.
아무튼, 퇴직 이후 작업에 몰두하며 「오징어 게임 리스펙」 영화를 메타-패러디한 장범순의 모색은 건강해 보인다. 원작의 내용과 미장센
을 일정 부분 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사회·문화에 대한 시각적 비판성을 그래픽/회화의 장르간 경계를 넘나드는 독자적 방식
으로 시도한 점도 긍정적이고. 그래선가 지금처럼 그의 욕심 없고도 새로운 회화작업에의 도전이 길게 이어지기를, 후배로서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