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 전병현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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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는 자연에서 잉태된 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지어낸 마음의 다. 한가지의 일상이 아닌 ‘영원을 향한 본디의 마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꽃이지요. 그걸 보는 세인들이 행복하라고 그린 그림입니다.” 전병현의 꽃은, 그가 발견한 가장 풍요로운 대상, 이러저러한 따스한 기억
-작가노트 중에서 속으로 데려다주는 놀라운 마법을 부린다. 우리는 달항아리의 유행을 ‘전
통의 소재주의’ 혹은 ‘현대화된 브랜딩’이라 부른다. 하지만 전병현의 달항
전병현은 본향 本鄕 의 정서를 ‘긍정의 메시지’로 풀어내는 작가다. 한지 재료 아리는 ‘본질=대상의 정수’을 포착하는 ‘풍요의 마음’을 담는다. 블러썸 시
인 닥나무를 직접 재배해 ‘고행에 가까운 장인의 삶’을 추구하는가 하면, 리즈가 부감시(헬리꼽터를 타고 자연을 유영하는 듯한 기법)를 좇는 이유
‘한국의 습식벽화기법’을 연구해 ‘유백색의 블러썸’ 시리즈를 만든다. 두터 는 삶의 희로애락을 덤덤히 끌어안기 위함이다.
운 한지의 마티에르는 서구인들이 추구해온 유화에 대입하더라도 세계적 그렇게 무심히 둥근 항아리에 마음을 놓다 보면, 화가가 보는 ‘경이’의 시
인 경쟁력을 갖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원형이 가톨릭의 본산인 미켈란 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평정심’ 속에서 ‘매화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
젤로 michelagelo 의 천지창조 기법에 활용되었고, 습식벽화 기법이 동서고금 이다. 매화에 색이 개입된 까닭은 서세동점 西勢東漸 하는 시대를 넘어, 다이
의 시선을 오늘에 녹여낸 ‘블러썸 시리즈’는 휴머니티의 회복이자 ‘르네상 나믹한 K-Art의 심상을 그리기 위함이다. 오랜 프랑스 유학 끝에 작가는
스형 작가’인 전병현의 시그니처인 셈이다. 세잔이 생빅투와르 산 Mont Saint- “고국에 돌아왔으니 걍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려고 한다.”고 천명한 적
Victor 에서 ‘시간의 본질’을 좇은 것처럼, 붉고 파란 심상의 꽃들은 계절 사 이 있다. 그러하기에 블러썸시리즈는 작가가 정원에서 만난 여러 야생화
이를 넘나들며 우주를 하나의 작품 속에 녹여내는 것이다. 들이 매화의 마음과 만나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긍정의 꽃’으로 기능한다.
영원한 사랑의 표상, 전병현의 블러썸 순환하는 에너지, 한국미의 풍요로움
전통과 현대의 공감을 통해 독창적 창작세계를 구축해온 전병현은 장르 소설가 태기수는 이러한 순환의 에너지를 싹공의 이름에서 찾는다. 초하
朔
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자기혁신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좇 루삭 에 ◯을 더해 만든 말 싹공, ‘달의 화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
는다. 이지러지고 또 다시 차는 달이라는 뜻의 싹공(싹◯; 초하루 그믐달 상, ‘채움과 비움’ 속에 ‘가능성을 꿈꾸는 희망하는 그림’, 그것이 전병현의
號
과 보름달을 합친이름), 작가의 호 와 작업은 그렇게 일체화 된다. 전통미 블러썸이다. 전병현의 작품들은 구상이냐 비구상(추상)이냐를 따져묻기 보
술에 내재한 다층구조 Layers 를 깊이로 승부하는 작가의 시선은 저 멀리 높 다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그려낸 ‘본디의 마음그림’이다. 작가는 “바람
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 俯瞰視 기법이나 아니면 사람이 하늘의 별을 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필터링이 없이 태양에 스스로 몸을 맡긴 놈들을 그
올려다 보는듯한 시선을 통해 ‘심연의 한국미’를 파고든다. 프랑스 파리국 리는 것이 내 성격과도 맞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전통을 억지로 이어붙
립미술학교 Beaux-Arts 에 입학한 괴짜 한국인은 1985년 파리 꿰드라로와르 이기보다, 공감과 진정성으로 직관하는 것이 ‘진짜 전통을 잇는 마음’이라
오픈스튜디오와 1989년 파리 비트리 오픈스튜디오를 거쳐, 《현대인을 위 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료를 키우고 재배해서 하나의 생명력 있는
한 기념비》(1992, 서울 가나화랑), 《에네르지》(1992, 파리 블라키아화랑), 작품으로 탄생시키기까지, 어찌 보면 작가의 블러썸시리즈는 ‘백자대호 白
《현대인을 위한 기념비》(1996, 파리 나탈리오바디아 화랑), 《백색밀레니엄》 磁大壺 (달항아리의 본디명칭)’를 만들던 조선도공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어
(2000 서울 가나화랑), 《Blossom》(2007, 서울 가나화랑), 《숲》(2010, 서울 받은 것이 아닐까. 이번 전시작의 제목이 ‘Blossom(태어나서 만개한다는
가나아트센터) 등을 통해 다양한 형식실험을 거듭해온 우리 시대의 재주 뜻)’인 까닭이나, 전병현의 아호가 ‘싹공’인 이유가 ‘순환하는 세상의 본질’
꾼으로 거듭난 것이다. 곧 다가올 50여 년의 화업 畵業 , 조수나 대타를 쓴 을 작품에 되새기겠다는 ‘작가의 의지’이다. 달항아리에 꽂힌 그윽하게 만
素
적 없는 외로운 자기 승리의 삶, 쌓고 비워내어 그린 무화 無化 의 과정들 개한 꽃은 아리따운 미인을 보듯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심연의
積
은 ‘블로썸시리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뜻은 한국인이라는 뿌리 깊은 성정, 마음의 그윽함을 ‘긍정의 에너지’로 표
전병현의 블러썸을 만나는 것은 ‘르네상스의 산문집’을 소유하는 것과 같 출하려는 작가의 오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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