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임현주 개인전 5. 3 – 5. 15 가온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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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번째 임현주 개인전에 부쳐
- 전 보 미 (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
임현주 작가의 그림은 얼핏 보면 마치 동화책을 펼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러한 동화적인 감수성이 남기는 여운
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작품을 뒷받침하고 있는 리얼리즘이다.
부산 작가임을 자처하는 그의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해가 진 후에도 화려하게 자
신을 드러내는 해안 도시의 요란함보다는 산동네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희미한 가로등과 달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산복도로는 근대화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티의 서사에서 늘 주변부에
존재했고 얼른 갈아치워야 하는 낡고 가난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좁디좁은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
어있는 낡은 주택들을 전면에 세워놓음으로써 공적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삶의 단편들에 주목한다. 그
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자가용을 타고 잘 닦인 길을 지나가는 운전자보다는 가파른 계단을 지나 구불구불 어디
론가 이어진 골목을 걷는 산책자의 경험을 더욱 소중히 여긴다. 실제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고단한 삶과
사소한 일상을 천천히 마주하고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오늘날 예술이 가진 특권이
아니던가.
임현주 작가의 작품은 산동네라는 공간의 반추상적 재현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상과 그 속의 벅찬 삶의 무게를 낭
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노스탤지어에 빠진 지나친 감상주의나 삶의 모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초월주의와는 거
리가 멀다. 오히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축이 되는 환상적 요소들은 산복도로가 상징하는 근대화의 주변부적 존재
들이 단순히 시대에 뒤처진 패배자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와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생산적 주체임을 부각시킨
다. 평소 들뢰즈의 리좀(Rhizome)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그려내는 보통의 삶
과 사물은 뿌리줄기처럼 다채롭고 이질적이며 생동하고 꿈틀댄다. 산복도로를 따라 겹겹이 쌓인 집들은 삐뚤빼
뚤 저마다의 모양을 만들어내며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고, 장난꾸러기 머더구스가 응답이라도 하듯 그 사이에서
이야기를 이리저리 물어다 나른다. 이곳에서는 달님도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집집마다 다른 모습으로 처마 밑
보금자리를 환히 비춘다. 이러한 작가 특유의 시적 리얼리즘은 궁극적으로 차이와 다양성의 생성이 혼돈보다는
열린 다층적 질서를 만들어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집과 집 사이, 집과 나무 사이를 연결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골목과 계단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 대신에 무한히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세계를 표상하며, 서
로 어깨를 맞대고 우뚝 서 있는 집들의 형체는 자기긍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가 만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의미로서의 “우리”가 탄생함을 시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주로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키고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중심만을 향해 나아가도록 종
용 해왔다면, 여기 캔버스 속 사물들은 외부의 자극에 한껏 몸을 맡기고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대화를 준비하느
라 분주하다. 어두운 밤에는 은은한 달빛에 흠뻑 빠지고, 꽃잎이 흩날리는 봄에는 꽃잎에 물들고, 흐린 날에는 회
색 구름 빛을 반사하는 집들. 허리를 굽혀 지나가는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가로등과 먼 곳 어딘가로 계속 신호를
보내는 전봇대. 이들은 온몸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과 공간을 창조해 내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장벽조차도
연결 통로로 만들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