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박현희 초대전 2025. 9. 2 – 9. 15 갤러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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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흡—빛 조각〉
석채 및 혼합재료, 2 × 2 × 2 cm 큐브(수량 가변), 2025
Light Fragments
Seokchae (mineral pigments) and mixed media, 2 × 2 × 2 cm cubes (quantity variable), 2025
단순한 외형의 차용이 아니라 증식·분화·회복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서사를 조형적 시간으로 번역하려는 시도이다. 모티프
는 ‘생명세포의 줄기 모양’에서 출발하며, 백색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빛이 머물고 생명이 시작되는 생성의 공간으로 해석한
다.
관객이 작품을 천천히 둘러 걸을 때마다 광선과 동선이 교차하여 표면의 리듬이 재조정된다. 바닥에 놓인 ‘빛 조각’은 밀도
와 간격의 변화로 중심–주변의 긴장을 만들고, 잔광이 공간 전반으로 확산한다. 이렇게 형성된 경험은 한 지점의 정지된 시
각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시선과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감각의 합성이다.
보컬 없는 앰비언트 사운드는 느린 맥박과 호흡의 질감으로 이 생장 리듬에 공명한다. 시각·청각·신체 감각이 한 호흡으로
묶이며, 전시는 호흡하는 장(場)으로 작동한다. 소리는 형태를 밀어 올리거나 과장하지 않고, 빛의 변화와 표면의 미세한 떨
림을 지속과 감쇠의 곡선으로 정제한다.
여기서 그리지 않은 캔버스는 결핍이 아니라 준비된 침묵이다. 화면을 남겨 두면 빛과 그림자, 관객의 호흡이 스스로 선과
면을 그려 내고, 여백은 채색이 아닌 채광의 회화를 가능하게 한다. 한지의 섬유와 미세 요철은 이미 물질의 선을 품고 있으
며, 빛의 입사각과 관객의 이동이 보태지면 하이라이트와 반음영이 스스로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회화 행위는 색
을 더하는 일에서 빛이 머물 층을 마련하고 채광을 조율하는 일로 이동한다.
결국 ‘그리지 않음’은 가능성의 표면을 여는 선택이다. 프레이밍, 적층의 리듬, 표면의 결, 조명의 방향 같은 최소 개입 위에
서 남겨진 여백은 관객의 시선과 시간에 따라 현재형으로 갱신된다. 이 과정에서 덜어냄과 채움의 균형이 자연스럽게 드러
나고, 백색은 생명의 서사를 담는 조용한 매개로 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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