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김연식 개인전 6. 20 – 6. 29 갤러리모나리자 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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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며 만나는 경계들
이 선 영 (미술평론가)
‘교향곡; 인드라망’이라는 큰 주제를 4악장으로 나누어서 전시하는 정산 김연식의 작품전은 그자체로 색과 입자의 출렁임의 세계이다. 그의 작품
들은 현미경 아래의 미시적 우주부터 심우주(deep space), 때로는 인간의 시야에도 들어올 법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그의 ‘풍경’은 마
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관객이 어떤 세계로 해석하든 정지됨 없이 유동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팬데믹 시기에 칩거하면서 집중적으로 제작된 작
품들을 올해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여정이다. 지난 5월에 제1악장 ‘컵 속의 무한세상’이라는 부제로 전시했고, 이번 6월에 제2악장인 ‘파동과 입자
의 드라이브’ 전이다. 파동과 입자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상상이 펼쳐진다. 일견 색의 얼룩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심리 테스트
(Rorschach test) 얼룩처럼 다양한 해석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정산의 작품은 그의 ‘살과 뼈를 이루는’ 불교의 세계관은 기본으로 깔려있고,
인간의 마음에서 물리학적 이미지까지 아우른다.
16세에 불교에 입문한 1946년생의 작가이자 스님은 인사동에서 44년 전부터 사찰음식을 시작하기도 한 다방면의 활동가다. 악장으로 나뉜 전시
부제들도 그렇고 가게에 놓인 피아노는 그의 작품에 음악 또한 깔려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처음 그의 작품을 봤을 때 1960년대 서구
하위문화를 물들였던 몽환적(psychedelic) 음악 이미지가 떠올랐다. 출렁이는 곡선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자연만큼이나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
하기 때문이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미술과 물리의 만남](Art & Physics)에서 직선은 자연에서는 거의 결핍된 부분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모든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형태는 곡선이거나 아라베스크 형태다. 자유롭게 출렁거리는 색 띠의 향연은 자아의 확장과 연결된 활성화된 무의식을 표현
한다. 무의식 또한 그의 작품처럼 흐른다. 여러 겹의 띠로 출렁이는 무의식은 이원론이 지배적인 현실을 침식하거나 도전한다. 작가는 작품의 주요
형식을 선이나 띠보다는 그물과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물의 비유는 불교적 맥락을 가진다. 불교에서 나온 ‘인드라망’은 [화엄경]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은 망으로 첩첩이 쌓여있다’는 말에서 왔다. 이
망의 교차점에는 구슬이 달려있어 서로를 비춘다. 정산은 우리 시대의 인터넷을 그러한 망과 비교한다. 네트워크는 이전의 위계적 구조를 와해하
는 경향이 있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네트워크와 계층구조 간의 근본적 긴장 관계를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계층구조는 상위집단이
포함된 체계다. 대조적으로 네트워크는 밑에서부터 나타난다. ‘개인들은 노드(node) 역할을 하며 서로의 관계를 결정하고 쌓아가며 하나의 집단으
로 융합한다. 각 노드는 동등하며 스스로 방향을 결정한다. 민주주의는 일종의 네트워크이다. 한 무리의 새들이나 월드와이드웹 역시 네트워크다.’
(알렉스 라이트)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작품만 나오지만, 실제로 그는 대규모 설치미술에서 망을 사용하기도 했다.
2014년의 거대한 구형태의 설치작품에서 1600 개의 투명 줄에 매달린 면도날 48000개 이용해서 관객을 비추기도 했다. 면도날의 반사면들은
거울의 방과 같은 무한한 반향을 일으키며, 인드라망처럼 우리가 홀로가 아님을 웅변한다. 다른 설치작품에서는 그물을 실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후에 그는 그물을 환영의 세계로만 표현한다. 굵고 가는, 여러 색의 그물들이 첩첩이 쌓인 세계다. 그물은 섬세한 선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그는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의 비율에 따라 선의 강도와 밀도가 정해지며, 행위의 결과를 순간적으로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은 먹색만으로 이
루어진 전형적인 선화 못지않은 절제를 요구한다. 그에게 불교의 선사상은 이러한 찰라의 선택과 관련된다. 정산은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색을 억
압하지 않고 분출하되, 절도 있게 선택한다. 작업 과정은 그린다기 보다는 만들기에 가깝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부어 캔버스 위에 퍼트린 후
직관적으로 구성하는 단계를 거친다.
덧칠은 물론 수정도 불가능하다. 고치기보다는 막판에 흐트러뜨리는 만다라처럼 완전히 다시 시작한다. 작가조차도 같은 똑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수많은 섬세한 겹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일 듯하지만, 주사위를 던지는 듯한 우연적 과정을 포함한다. 자신으로부터 용솟음
치는 것을 순간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그는 가상의 그물을 친다. 절묘한 순간이 선택되어 갈무리될 때,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결
과이기에 작업은 그에게 종교적 수행만큼이나 필연적이다. 그는 ‘예술의 길은 도 닦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작업 과정 중 무아지경은 선의 경지와
비교된다. 작업에 몰입하는 과정은 매일 새벽 4시에야 끝난다. 모나리자 갤러리 2개 층에 걸린 이번 전시는 둥글거나 사각형의 캔버스에 담긴 70
여 점의 작은 작품들이 상호작용하는 우주를 연출한다. 사각형이나 원안에 담긴 세계는 이전의 설치작품처럼 서로를 비춘다.
작가는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라는 전시 부제에 대해, ‘양자역학에서 주시하지 않을 때는 파동, 실험할 때 입자로 변하는’ 성질에서 영감을 받았
으며, ‘드라이브’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범주가 ‘서로 얽히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에서 부처님이 말한 ‘우주 전체의 연결’을 본
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앞서 인용된 책에서,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상보(相補)성의 원리가 고전적 관점에서 양립 불가능하다는 가설을 종합했다고
평가한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측면만 진리로 여겨져 대립해온 것이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빛이 입자라는 믿음
을 가진 뉴턴과 해안에 부딪히는 물처럼 에테르를 통해 굽이치는 파동이 빛이라는 믿음을 가진 호이겐스의 입장을 대조한다.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과학은 절대적 시점을 유지했다. 뉴턴은 ‘진리는 절대적이며 그 자체가 수학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그 자체의 본질에서 흘러나와 어떤 외부
사물에 관계없이 항상 유사하고 고정된 채로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양자역학의 세계는 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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